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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4. 2019

한 말씀만 하소서

영화 속 한 마디의 힘

규칙의 사수(死守)와 착한 사람들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대사 중에서 ‘한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전체 스토리 전개나 장면 장면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그 한 마디의 대사가 크게 심금을 울려서 그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되는 예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 ‘한 마디의 대사’가 크게 입소문을 타고 마치 만능키처럼 여기저기 사회의 어둡고 막히고 굽은 곳들을 혼내주고 다니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니가 가라, 하와이”, “마이 뭇다 아이가”(<친구>) 같은 것도 있고, “뭐시 중한디...?”(<곡성>) 같은 것도 있고,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내부자들>) 같은 것도 있습니다. 각기 유행하는 계기가 다르고 사용되는 맥락이 다릅니다. 억지로 앞에 나온 말들을 한 번 나누어 보자면 (하버마스 식으로)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해방적 관심에 각각 부응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니가 가라, 하와이”는 새로운 이해에 대한 욕구인 기술적 관심, “뭐시 중한디...?”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주목하는 실천적 관심,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정치적 출구를 모색하는 해방적 관심에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재미삼아 ‘억지로’ 붙여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대사들의 공통점은 영화가 던지는 주된 메시지와 별개로 인생의 단면을 ‘한 줄로 요약’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가 노리는 전체적인 메시지 전달의 의도와 효과를 넘어서는 울림이 있는 말들입니다. 영화는 이 ‘대표 대사’ 한마디에 의해서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됩니다. 대사 한 마디가 영화 전체와 맞먹는(능가하는) 힘을 가집니다.     


크게 유행한 대사는 아닙니다만 최근에 저에게 큰 울림을 준 영화 대사는 “나이가 들어서는 규칙을 위해서 죽는다.”(<일대종사>)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지금 만나러 갑니다>)였습니다. 무협과 멜로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지만 제게는 둘 다 윤리 교과서로 읽혔습니다. 저의 기술적, 실천적, 해방적 관심에 골고루 응답을 주는 영화들이었습니다(오늘 연예 뉴스가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우리나라 영화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전하는군요). 나이 들어서는, “규칙을 위해서 죽는다.”라는 말을, 하등의 망설임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내뱉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일대종사>는 전합니다. 또, 가치 있는 일을 만나는 일에 하등의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보여줍니다. 아무 것도 모를 때부터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몰렸던 것이 우리 7080, 전후 출생 세대입니다. 역사가 강요한 야만을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윤리 교과서를 끊임없이 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직 각자도생(各自圖生, 제 각기 살 길을 도모함)입니다. 그 노력을 한시라도 게을리 하면 한순간에 짐승으로 떨어집니다.     


몇 년 전 학교에서 하던 운동을 밖에서 할 수밖에 없어서 운동공간(검도장)을 하나 만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정글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물론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어려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평생 책상만 끼고 살다가 실제로 필드(?)로 나가니 모든 게 서툴렀습니다. 그때마다 오직 하나, ‘규칙의 사수’만 생각했습니다. 후속 세대들에게 보여줄 ‘선배의 자세’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시작을 하니 주변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일단 집사람이 관장을 맡아주었고(임대 보증금 및 시설비 전액 부담),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왔습니다. 건물 주인이 운동 시의 소란을 양해했고, 동네 어르신들이 또 그 소란을 용납해 주셨고(노인들만 있는 골목에 젊은이들이 드나드니 좋다고 했습니다), 목공소, 출력센터(간판), 동네 철물업소(철거 및 시공), 전기 사업자, 주차장, 떡집(기념품) 등등에서 많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휘호를 써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착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열심히, 착하게, 남들과 잘 지내며, 규칙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었습니다. 학교 안에서보다 학교 밖에서 더 많이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꼬빡 4년을 거기서 운동을 했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운동을 하고 있는 지금(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설도 훨씬 나아졌습니다. 천정도 높고 마루 넓이도 두 배 정도 됩니다. 그렇지만 열악한 환경이었고 몸은 더 고되었지만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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