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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5. 2019

발꿈치에 씩씩하니

주역, 뇌천대장

발꿈치에 씩씩하니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칼로 사람을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요 며칠 동안의 정국(政局, 정치계의 형편)이 딱 그런 현상입니다. 여론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려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넘쳐납니다. 공격하는 쪽에서나 방어하는 쪽에서나 ‘칼 빌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여론 재판이라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몇 몇 신문이나 방송이 주도하던 여론 재판이 sns의 몫으로 많이 넘어온 상황이라 정치계의 차도살인도 이전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모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에서 독한 마음을 품고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겠다고 참소하면 그런 참소의 대상이 되는 인물 역시 “내 모든 것을 내놓겠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체모를 생각하지 않고 “일대 일로 만나서 승부를 가리자.”라는 결투 신청까지도 나옵니다. 옛날 같으면 제후나 재상 급에 속하는 인사들이 국민들 앞에서 보여주는 행태들입니다. 나라가 갑자기 춘추전국시대나 후한(後漢) 말기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영웅과 책사(策士)들이 동분서주하고 자객들이 암약합니다. 주역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는 지 궁금해집니다.   

  

주역 서른네 번째 ‘뇌천대장(雷天大壯)’, 대장괘(大壯卦)는 ‘군자의 씩씩함’을 이야기합니다. 경문(經文)에 대한 상전(象傳)의 해설은 “우뢰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대장(大壯)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예가 아니면 이행하지 않느니라.”입니다. 군자는 대장(大壯)으로서 예를 쫓는 존재라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효사(爻辭)에서는 ‘군자의 씩씩함’에 대해서 하나하나 밝힙니다. 초구(初九)의 효사가 압권입니다.    

 

초구는 발꿈치에 씩씩하니 가면 흉함이 틀림없으리라. (初九 壯于趾 征凶有孚) -- 크게 씩씩한 자는 반드시 스스로 마쳐서 완성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고 침범하면서 그 씩씩함을 다하는 이는 있지 아니하다. 아래에 있으면서 씩씩하므로 ‘장우지(壯于趾)’라 하였다. 아래에서 강장하니 나아가면 반드시 궁하고 흉하므로 ‘정흉유부(征凶有孚)’라 하였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68쪽]    

 

소인들의 씩식함, 다른 이들을 억누르고 침범하는 씩씩함,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 남의 허물을 파헤치는 씩씩함을 주역은 ‘장우지’라 말합니다. 장(壯)해도 장(壯)하지 못한 것을 “발꿈치에 씩씩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반드시 궁해질 행색입니다. 나머지 효사들을 이어서 소개합니다. 

    

구이(九二)는 바르기 때문에 길하니라.

구삼(九三)은 소인은 장함을 쓰고(用壯) 군자는 그물로 여기니(用罔), 바르더라도 위태하니 숫염소가 울타리를 들이받아 그 뿔이 걸리도다. 

구사(九四)는 바르게 하면 길해서 후회가 없어지리니, 울타리가 터져서 걸리지 아니하며 큰 수레의 바퀴통이 씩씩하도다.

육오(六五)는 양을 쉽게 잃으면 후회가 없으리라.

상육(上六)은 숫염소가 울타리를 받아서 물러나지도 못하며 나아가지도 못해서 이로운 바가 없으니 어려움을 견디면 길하게 되리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68~271쪽]    

 

‘소인은 장(壯)함을 쓰고 군자는 (그것을) 그물로 여기’는데, 소인의 장함이 ‘숫염소가 울타리를 들이받아 그 뿔이 걸리’는 흉사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울타리를 헐어서 큰 수레가 나아갈 길을 막지 아니한다는 것, 그 모든 어려움을 견디면 장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소인은 장함을 쓰고 군자는 (그것을) 그물로 여긴다’는 말에서 많은 후회와 반성이 일어납니다. 사실 이 대목은 며칠 전 별다른 ‘울림’이 없어서 따로 생각을 하지 않고 건너뛴 부분입니다. 얼핏 남이 하면 '용장(用壯)'이고 자기가 하면 '용망(用罔, 그물로 씀)'이 아닌가라는 용심(用心)도 있었습니다. 과연 주역에서 상찬하는 군자(君子,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인간상인가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한때 군자 같던 이도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인 본색을 드러내는 것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안팎으로 ‘숫염소가 울타리를 들이받는’ 일도 빈번해서 제 자신을 돌아다 볼 여유가 없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때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괘를 제 콘텍스트 안으로 초대해서 진지하게 음미했더라면 제 안을 들여다보고 최근의 저의 ‘어둡고 막히고 굽은’ 상황들을 좀 다스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오늘의 가당찮은 사지통과 소화불량도 아마 저의 앞뒤 가리지 못하는 ‘소인의 용장(用壯)’에서 비롯된 것이지 싶습니다(이것도 라캉이 강조한 프로이트의 '사후작용事後作用nachtraglichkeit'이겠죠?). 어쩌면 그런 생각 자체가 ‘용장’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늦게나마 (생각 없이) 앞으로 되돌아가서 ‘장우지’를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하여야겠습니다. 저의 최근 용장(用壯)과 용망(用罔)에 대해서 작지만 유용한 발견을 얻은 것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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