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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5. 2019

꿈꾸는 순진한 어른들

신데렐라와 몽실언니

꿈꾸는 순진한 어른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왜 모두 왕자 아니면 공주냐, ‘신데렐라’보다는 ‘몽실언니’를, ‘유리구두’보다는 ‘검정고무신’을 아이들에게 자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아이들에게 환상을 지나치게 많이 보여주는 것은 교육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순진한 문제의식이 한동안 득세하던 때가 있었다.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여야 한다는 우직한 도그마도 그 무렵에 고착되었다(권정생, 이오덕 선생님은 존경한다. 오해 없기 바란다).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은 '아이들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사실, '유리구두보다는 검정고무신을' 식의 교육적 고려는 어른들의 것이지 아이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순진한 ‘어른(특히 교육학적 사고로 무장한)’들이지 순진하지 않은 우리 현실의 ‘아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순진하지 않다’라는 말의 뜻은 현실을 곡해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순진하게도(?) 이미 현실의 강력한 지배를 여과 없이 받고 있기 때문에 ‘이중적이고 순진한’ 어른들과는 달리 최대한 영악하고 이기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들은 ‘몽실언니’와 ‘신데렐라’를 충분히 이해한다. ‘검정고무신’에서는 현실을 읽고 ‘유리구두’에서는 환상을 본다. 그렇게 열심히, 분주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우리 현실의 아이’들이 아무리 많은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읽는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가 왕자나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 짐짓 흉내내거나 꿈꿀 뿐인 것이다. 그런 현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아이들의 ‘꿈 이야기’를 공연히 트집 잡는 어른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꿈꾸는 순진한 어른들’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때로는 환상을 통해 현실을 알아나가기도, 현실을 넘어서기도 해야 한다. 누구나 처음엔 세상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품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망상은 깨어지고 만다. 전능감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일말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터득하게 된다. 직접 세상에 맞부딪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절감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것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하게 된다. 약한 아이들은 “왜 세상은 날 이해해주지 않는 거야?”라며 좌절하고 강한 아이들은 “운명아 비켜라 내가 나아간다.”라며 세상과 싸워나간다. 좌절과 도전이 반복되는 가운데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 어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환상을 꿈꾸는 사람을 우리는 몽상가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현실 속에 안주하며 그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시키는 대로 살지만 이들 몽상가가 있어 사회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고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이들을 ‘현실도피자’라고 말한다. 힘든 현실에 맞서 직접 부딪쳐 싸워나가려 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꿈과 같은 이상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현, 『전래동화 속의 비밀코드』(살림,2009.3쇄), 26~27쪽]


아이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6세 전후, 늦어도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라고 한다. 내 경우는 좀 일러서 서너 살 무렵부터 ‘현실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졸작, 『장졸우교』 참조). 집에 책이 없어서 초등학교 시절은 ‘꿈 이야기’를 맛볼 수가 없었다(졸작, 『우청우탁』 참조). ‘환상’을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그 이전까지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살았다. 전능감은커녕 최소한의 자존심도 벌써부터 버리고 철저하게 굽히며 살았다. 초등학교 때의 나를 기억하는 이들은 ‘묵묵히 운동장 주변을 맴도는 말 없는 아이’로 나를 알고 있다. 늘 공상 속에서 살았다.


사족 한 마디. 그런데 초기 ‘전능감’을 제 때에 버리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까지 ‘트러블 메이커’로 사는 이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그런 인물들 중에서 특히 ‘몽실언니’나 ‘검정고무신’ 숭배자가 많이 발견되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면서 제 자신은 끝까지 ‘왕자와 공주’로 살려는 그런 ‘아이-어른’들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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