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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16. 2019

부엌에 고기가 있으면

주역, 천풍구

부엌에 고기가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부엌에는 불이 있고 음식이 있어 생명을 보전(保全)하는 힘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고래로 부엌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공간적 상징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부엌의 주인이 그 집의 안주인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모성성 발현의 공간적 메타포로도 자주 인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부엌이나 그것과 관련된 기물(器物)이 자주 나타나면(꿈이나 자유연상에서) 기대되는 모성에 대한 어떤 결핍감을 암시한다고 보는 식이지요. 바슐라르 식 몽상(夢想)이라면 더 한 의미가 부여될 것입니다. 아궁이에 불이 지펴질 때마다 한 가족의 ‘삶의 죽음과 부활’이 매번 성수(成遂)되는 신비한 의례 공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시골 고향집을 보존하면서 이따금 방문해서 한 번씩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고 합니다. 그 아궁이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그 작은 몸으로 온 식구를 먹일 밥을 짓고 국을 끓이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요. 어떻든, 부엌은 의미심장한 장소입니다. 주역에서 그 ‘부엌’을 그냥 둘 리가 없겠지요.  


... 구이(九二)는 부엌에 고기가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니, 손님에는 이롭지 아니하니라. (九二 包有魚 无咎 不利賓) -- 초효(初爻)는 음으로 맨 아래에 있으므로 ‘어(魚)’라고 하였다. 부정한 음(陰)이 만남의 시작에 처했으니 가까이 있는 자를 거스를 수 없다. 초효가 자기에 맞는 부엌을 스스로 좋아서 찾아온 것이요, 침범해서 빼앗은 것이 아니므로 허물이 없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제멋대로 자기의 은혜로 삼음은 의리상 하지 못하는 바이므로 ‘불리빈(不利賓)’이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340~341쪽]


주역 마흔네 번째 ‘천풍구(天風姤)’, 구괘(姤卦)의 경문(經文)은 ‘구(姤)는 여자가 씩씩하니 여자를 취하지 말지니라(姤女壯勿用取女)’입니다. ‘부적절한 만남을 피하라’라는 교훈으로 읽힙니다. ‘법보다 때’, 때의 의의가 큰 괘입니다. 매사에 조심하여 임하여야 흉함을 면할 수 있습니다. 효사에서도 그런 취지가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두에 소개한 구이(九二) 효사(爻辭) 역시 그렇게 읽힙니다. 공교롭게도 구문론적 차원에서 작금의 고위공직자 후보 청문 상황과 연관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부정한 음이 만남의 시작에 처했으니 가까이 있는 자를 거스를 수가 없’는 법인데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제멋대로 자기의 은혜로 삼’는 의리 없는 자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화가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의리’는 공직자로서의 국민에 대한 의리로 해석됩니다. 말 그대로 ‘부엌에 있는 고기’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초효가 자기에 맞는 부엌을 스스로 찾아온 것이라 허물이 없다”라고 해서 자기 부엌의 고기를 이리저리 돌린 자는 나무랄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양비론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고기(魚)는 또 ‘백성’으로도 읽힙니다. 의미론적으로는 그쪽이 바른 해석입니다. “부엌에 고기가 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사는 부엌에 고기가 없으니 흉함을 일으키리라. (九四 包無魚 起凶) -- 이효(二爻)가 그 고기(즉 초효)를 차지했으므로 그것을 잃었다. 백성이 없이 움직이고 응함을 잃고 작위하니 흉하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342쪽]


시간이 지날수록 부엌에 고기가 떨어질 공산이 높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백성들의 지지지를 잃을 공산이 큽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입니다. 부엌에 고기 없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흉흉한 세월이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4월 16일, 흉한 기운이 우리나라를 온통 감싸 돌던 5년 전, 그렇게 먼저 간 아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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