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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0.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최종병기, 뒤집는 글쓰기

최종 병기 뒤집기     

설명의 최종 병기, 최고 경지는 ‘뒤집기’다. 상식적 해석을 뒤집어서 남다른 해석을 꾀해 새로운 발견으로 이끈다. ‘단단하고 위태로운’ 글쓰기다. 웬만한 글 솜씨로는 넘볼 수 없는 고수들만의 글쓰기 경지다. 그렇다고 손 놓고 쳐다보기만 할 수는 없다. 일기일경(一機一境), 사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니 내 안에서 작지만 볼 만한 꽃 하나를 피워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실행할 일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란 듯이 남들의 공감과 격려,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보람의 날을 맞이할 수 있다. 예문을 보면서 ‘뒤집는 글쓰기’의 태도와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귀신이 보낸 편지>     

이번에는 귀신이 보낸 편지 이야기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늘 하던 식으로 어려운 공부 하나 했으면 한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게 좀 있어야 제대로 생을 즐길 수 있다고 옛날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셨으니 일단 그 말을 새겨듣도록 하자. 그것과는 별개로, '귀신=두려움'의 공식을 깨는 것도 이 글의 한 부수적인 목표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굳이 이것저것 두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출처를 ‘무지(無知)’에서 찾는 이들이 있다. 무엇이든 몰라서 무섭고, 몰라서 화근이고, 몰라서 해악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알면 모든 어려움과 불편함이 다 해소된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신유학(新儒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지식이 무슨 와이파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지식이 쌓이면 그저 ‘팡팡 터지는’ 어떤 경지가 있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지식의 역할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알아서 손해 볼 때도 적지 않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일 때가 많다. 

불편한 문제는 항상 우리의 내부로부터 발생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생각은 자기중심적이고, 피해망상적이거나 과대망상적이다. 우리가 흔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보고 “생각이 많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듯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프로이트가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두려운 낯섦 Unheimliche’에 대한 프로이트식의 재미있는 설명이다. 호프만의 「모래인간」을 응용한 것이라 상당히 문학적이다.  

   

.....독일어 단어 unheimlich는 분명히 <집과 같은(heimlich)>, <고향 같은(heimisch)>, <친밀한(vertraut)> 같은 단어들의 반의어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한 사물이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것이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친숙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롭고 친숙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분명 모든 것이 다 두려움을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과 마주하면서 사람들이 두려운 감정과 이상하게 불안하게 하는 감정을 좀 더 쉽게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 중에는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들이 있지만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롭고 친숙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것>이 첨가되어야만 한다. <중략> 이상하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무언가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방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종내에는 몰랐던 것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잘 식별해 낼수록(방향만 서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불안감을 주는 사물이나 사건들에서 그런 감정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프로이트(정장진 옮김), ‘두려운 낯섦’,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열린책들, 1997, 102쪽.>    

  

프로이트에 의하면, ‘두려운 낯섦의 감정’은 오래되었지만 친근하고, 친근하지만 오래된 것이 억압된 결과이다. 그것들은 늘 ‘자기 집(Das Heimische)’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귀신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가 자기가 사는 집이나 학교, 아니면 폐가나 날은 종교시설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unheimlich’는 억압당한 ‘heimlich-heimisch’이며, 그것의 회귀도 바로 억압을 당한 그곳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전혀 낯선 것들, 우리의 집 안에 있지 않은 집 밖의 것들은 큰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운 낯섦의 기원을 억압된 친숙한 것에서 찾아낸 프로이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두려움의 조건들을 열거한다. 생각의 전능성, 욕망의 순간적인 실현, 숨어 있는 해로운 힘들, 죽은 자들의 돌아옴 등이 그 조건의 목록들이다. 한편으로 비켜 놓았던 옛날의 믿음들이 사실로 입증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두려운 낯섦의 감정을 가진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결국은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이니?”라는 말이 가장 무서운 말이라는 것이다.

영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9)는 죽은 한 남자가 살아생전의 두 연인(戀人)에게 치유의 은사(恩賜)를 내린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매개가 되는 것은 편지(러브레터)다. 그 사랑의 편지를 통해서, 두 여인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편지는 명실공히 러브레터가 된다. 한 여인은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고 미련을 담은 편지를 죽은 연인의 옛집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그 남자의 동명이인의 첫사랑은 그 편지에 장난 삼아(사실은 무의식의 호응으로 보인다) 답장을 보낸다. 그렇게 상처 입은 두 여인이 편지를 통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쓰다듬어 주는 스토리를 지녔지만 한 꺼풀 벗겨서 보면 또 다른 생의 이면을 볼 수도 있다. 죽은 한 남자가 살아 있는 두 여자에게(한 사람은 첫사랑, 한 사람은 마지막 사랑이다)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 <러브레터>는 ‘귀신이 보낸 편지’가 살아있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귀신(남성 후지이 이츠키)은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생전의 연인(와타나베 히로코)에게 오타루에 있는 자신의 분신(동명이인)이자 첫사랑인 만성 감기증 환자, 여성 후지이 이츠키에게 편지를 쓰게 한다. 귀신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히로코에게 중학교 때 앨범을 보여주고(어머니가 대행한다) 편지가 가야 할 곳의 주소를 가르쳐 준다(여성 후지이 이츠키의 집주 소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에 그것을 기록한다. 그것은 영혼의 문신이다. 귀신과의 약속을 나타내는 징표다.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 와다시와 겡끼데스.”라고 편지의 서두를 장식하는 것은 이츠키가 늘 감기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을 알고 있는 귀신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 겉으로는 남성 후지이 이츠키의 안부를 묻는 말이지만 속으로는 여성 후지이 이츠키의 병든 상태(첫사랑의 상실 경험 때문에 그녀는 사랑 불능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를 염려하는 말이다.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다. 그 유명한, 순백의 설원(雪原)에서 행해지는 살아남은 자의 절규, “오겡끼데스까? 와다시와 겡끼데스!”는 그런 맥락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대사다. 히로코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 아프지 않습니까”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귀신이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다. 오타루의 후지이 이츠키는 겉으로는 (감기가 페렴으로 도져 죽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그런 식으로 ‘연장’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첫사랑에게(그녀가 사랑을 고백하지 않아서 그렇게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무의식은 그렇게 생각한다) 일찍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죄과에 대한 자기 처벌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달고 사는 감기와 남자 기피증이 바로 그 징벌의 세목이다. 물론 둘 다 무의식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감기 증상이 떠나는 것과 남자가 접근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한다. 

히로코가 보내는 편지는 오타루의 이츠키에게 사랑(첫사랑) 이야기를 요구한다. 당신이 내 죽은 연인의 첫사랑이 아니냐고 집요하게 추궁한다. 물론 귀신이 그것도 시켜서 하는 일이다. 죽은 후지이는 히로코를 시켜 살아서 못 들은 첫사랑 고백을 기어이 받아내고 싶어 한다. 오타루의 이츠키 역시 조금도 지기 싫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첫사랑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벼른다. 경쟁자가 두 말 할 수 없는 결정적인 첫사랑의 징표들만 골라서 히로코에게 송부한다. 겉으로는 “그 아이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어요”라고 쓰지만, 속으로는 “이런 일도 있었어! 놀랐지?”를 연발한다. 그렇게 그녀는 항상 자신이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히로코와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절대 자신은 누구의 첫사랑 따위는 아니라고 강변하면서도, 죽어도 죽은 당신의 연인이 내 첫사랑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불패의 첫사랑이라는 자신의 존재 증명을 끝까지 완수해 내고, 결국은 히로코의 항복을 받아내고 만다. 히로코로부터 “나는 당신의 조잡스런 복사본에 불과했습니다”라는 자백을 기어이 받아내고 만다. 그래서 히로코는 죽은 연인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새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되고, 이츠키는 귀신이 되어버린 첫사랑을 애도하면서, 그의 사랑을 물증으로 확인하면서(도서카드의 뒷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을 확인한다. 그것은 그녀의 첫사랑이 떠나는 날 자신에게 준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뒷면에 꽂혀 있었다), 자기 처벌의 오랜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새로운 삶이, 사랑 가득한 미래가 그녀를 기다린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죽어서도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모양이다. 살아서 진정했던 자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살아생전의 자취로, 산자들을 독려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나간다. 지금도 ‘귀신이 보내는 편지’는 여기저기서 우리를 독려한다. 여기저기서 우리의 ‘개봉(開封)’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호시탐탐(虎視耽耽), 개봉박두(開封迫頭)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편지도?(이 무슨 망상인가!)

추신 1 : 여기서 ‘귀신의 역할’을 기호의 힘으로 보면, 기표의 창발성이 그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는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추신 2 : 여기서 ‘귀신의 역할’을 시간의 문제로 치환하면, 기억이라는 ‘과거의 현전’을 통해 그들은 현재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그들이 주고받는 편지는 기억의 ‘발굴’에 필수적이 매장물 지표가 된다.

추신 3 : 여기서 ‘귀신의 역할’을 신경증으로 보면, 편지의 주인인 그녀들은 각각에 필요한 애도를 충분하게 행하지 못해(후지이 이츠키는 아버지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고 와타나베 히로코는 새로운 연인과의 만남으로 인한 죽은 후지이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얻은 신경증으로부터, ‘러브레터라는 자기 고백의 과정을 통해, 필요한 만큼의 사면의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질병의 치유라는 은사를 입고, 병자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양선규, 페이스북>


인용된 예문 <귀신이 보낸 편지>는 영화 <러브레터>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는 글이다. 추신에서 제시된, 기존의 해석을 대표하는, 각각 다른 세 가지 관점을 ‘귀신’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최소한 새로운 관점 하나를 추가하는 소득은 얻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귀신=두려움’의 등식을 깨고 싶다는 글쓰기의 부수적인 의도도 자연스럽게 성사되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귀신’이라는 <천녀유혼>적인 스토리텔링의 결과일 것이다.   

‘귀신’을 산 사람들의 일에 개입시켜 새로운 해석을 도모하겠다는 위 예문의 시도는 어떻게 보면 비합리적이고 비학문적인 접근일 수도 있다. 그만큼 위태로운 글쓰기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등장인물의 성격에 잠재된 무의식적 불안과 죄책감을 ‘귀신’이라는 말로 환치해서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공감의 계기를 마련해 내고 있다. 기호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해석이 보여주는 ‘하나를 취하기 위해서 열을 버리는’ 해석적 손실이 상당 부분 극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석을 하는 이유는 텍스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인데 위의 예문은 그 이치를 ‘귀신’이라는 한 마디 말로 쉽게 설명해 내고 있다. 


<귀신이 보낸 편지>가 뒤집고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알면 보인다”라는 널리 퍼져 있는 상식 혹은 편견을 뒤집고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세상을 보면 하나를 얻고 열을 놓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② “귀신은 두려운 존재다”라는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내 마음속의 상처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방통행식 두려움의 대상화(귀신)를 비판하고 있다.

③ 해석은 의미를 추가할 때만 해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왕의 해석들이 자기를 세우기 위해 다른 것들을 깎아내리는 것을 뒤집는다. ‘귀신이 보낸 편지’라는 관점으로 기호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관점을 모두 포용한다. 추신 1,2,3은 그런 뒤집기의 전말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뒤집는 글쓰기는 어쩔 수 없이 단단하고 위태롭다. 함부로 남발할 수도, 두려워서 외면할 수도 없는 글쓰기다. 설명의 최종 목표는 설득이다. 남을 설득할 수 없는 글은 진정한 설명이 아니다. 설득은 다른 사람의 머리 안에 내 생각을 집어넣는 일이다. 속된 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남의 돈을 내 주머니 속으로 옮기는 것과 내 생각을 남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만큼 어렵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공자도 그 일에서는 명쾌하게 성공하지 못했다. 설득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의 주유천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당시의 시대 관념이 공자의 코드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자가 장자처럼 뒤집기의 명수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뒤집기가 설명의 최종 병기라면, 뒤집기의 최종 병기는 ‘자기 뒤집기’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만약 ‘자기 뒤집기’의 명수였다면 그것이 지닌 세뇌(洗腦)의 힘으로 제후 한두 명 정도는 완벽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뒤집을 수 있을 때 뒤집어야 하는 연유도 바로 그 ‘설득의 어려움’ 때문이다. 뒤집기야말로 성문을 부수고 독자의 불신의 성채(城砦)를 공략할 수 있는 필승의 공성(攻城)의 기술, 설명의 최종 병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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