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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0.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2강. 묘사, 묵은 빚 문서

2. 절박함으로 승부해야 – 묘사의 조건     


묘사묵은 빚 문서     

글쓰기도 기예(技藝)의 일종인 이상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남들도 인정하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수필이면 수필, 관심 분야의 좋은 글들을 많이 읽고 개성을 살려 나만의 글을 정성껏 써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무조건 좋은 글을 골라 베껴 써보라고 권하는 이도 있는데 그런 마구잡이식 공부는 대체로 도로(徒勞)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그릇’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아직은 물건을 담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덜 익은 그릇인데, 탐이 난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마구 눌러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릇이 깨어져서 글쓰기에 대한 흥미를 아주 잃을 수가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개성을 살려 나만의 글을 정성들여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 놓고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글쓰기 연습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글쓰기 둔재였던 나의 경험에 따르면 1년 정도의 연습 기간이면 충분했던 것 같다. 물론 설명, 묘사, 서사, 논증에 다 능통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없앴다는 뜻이다. 마침 그때가 타자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때여서 어떤 날은 하룻밤을 새워 단편소설 초고 한 편을 써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스마트 사회를 살고 있고 어디서든 컴퓨터 글쓰기가 보편화된 지금은 그 연습 기간이 훨씬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설명의 팔 할이 ‘나’라면 묘사는 구 할이 ‘나’다. 그만큼 나의 품성, 나의 식견, 나의 상처가 큰 역할을 한다. ‘묵은 빚 문서’라는, 이청준의  「눈길」에 나오는 묘사의 한 구절로 묘사론의 첫 표제로 삼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묵은 빚 문서’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때 심금을 울리는 진(眞)묘사가 이루어진다. 얕은 생각으로 끼워 맞춘 가(假)묘사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진정한 묘사가 탄생한다. 처음 소설 공부를 할 때 내게 가장 부담을 주었던 것이 적재적소에 사건의 전개를 암시하는 묘사를 배치하는 일(배경묘사)과 대사 사이에 들어가는 지문(地文)을 부담 없이 만들어내는 일(장면묘사)이었다. 그 당시에는 오정희, 박기동, 조세희의 소설을 많이 공부했는데 속도감 있는 그들 소설의 장면묘사에 주눅이 많이 들었다. 특히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안개 묘사 장면, 그리고 이청준의 「눈길」에 나오는 고향집 묘사 장면 배경묘사 같은 것들은 거의 묘사 청맹과니 수준이었던 문학청년에게 깊은 절망감을 선사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눈길」부터 살펴보자.

     

...지열이 후끈거리는 뒤꼍 콩밭 한가운데에 오리나무 무성한 묘지가 하나 있었다. 그 오리나무 그늘에 숨어 앉아 콩밭 아래로 내려다보니 집이라고 생긴 게 꼭 습지에 돋아 오른 여름 버섯 형상을 닮아 있었다.

나는 금세 어디서 묵은 빚 문서라도 불쑥 불거져 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이청준, '눈길'>

      

서울에 올라가 작은 성공을 이룬 아들은, 당신의 사후에 겪을 자식들(하나 남은 아들과 며느리들)의 난처한 상황을 염려해서 어머니가 벌이는 모종의 음모(단칸방 증축)에 투정어린 불만을 토로한다. 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느냐는 게 아들의 불만이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이 성공한 아들의 오래 묵은 부채감을 ‘불쑥 불거져’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도 그것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마지막 바람을 아들이 들어주기를 요구한다. 어머니가 나랏돈 지원을 받아 지붕개량 사업을 해서 방 한 칸을 더 들이고자 하는 것은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운 큰며느리에 대한 보은일 수도 있고, 서울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작은 아들에게 내리는 가벼운 징벌일 수도 있지만, 겉으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장례식 때 겪을 단칸방의 불편함을 미리 해소하자는 선한 의도였다. 작가는 모자간의 그 복합적이고 미묘한 원망(願望)과 원망(怨望)의 교차를 세필(細筆)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세필화의 첫 출발점이 되는 것이 위에 인용된 ‘묵은 빚 문서’ 묘사 장면이다. 어머니가 가진 ‘묵은 빚 문서’는 ‘숨어 있는 버섯’ 같은 내 죄의식을 짓눌러 ‘조마조마한 기분’을 들게 한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묵은 빚 문서’의 내용은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난다. 어린 시절 ‘눈길’에 얽힌 모자간의 ‘비의(秘儀)’를 통해 드디어 그 실체가 드러난다. ‘눈길’이 ‘눈물의 메타포’가 되는 이유가 밝혀진다. 

‘묵은 빚 문서’라는 우리 시대 최고의 묘사가 아무렇지 않게 툭 불거져 나온 것은 그것이 ‘나’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눈길」이라는 희대의 서정소설은 위에 인용한 세 문장을 주춧돌 삼아서 지어진 집이다. 단 세 문장의 묘사문이 「눈길」이라는 절대 순수 언어로 된 사모곡을 탄탄하게 떠받치는 복선(伏線)과 수미일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화자의 ‘묵은 빚 문서’가 어떤 것인지를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것이 결국은 이 소설의 전말인 것이다. 한 여름 대낮의 지열, 그것을 식혀주는 서늘한 죽음의 그늘, 낮게 우거진 콩밭과 버섯처럼 힘없이 그러나 습지의 연약지반을 뚫고 당돌히 돌출한 지상의 방 한 칸. 그것이 바로 ‘나’의 내부였다. 

배경묘사를 통해 이야기 전개의 실마리를 찾고, 독자에게는 수수께끼 풀기의 동기를 동시에 부여할 수 있는 천종삼(天種蔘, 새가 씨를 날라서 퍼뜨린 산삼)과 같은 묘사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눈길」의 ‘묵은 빚 문서’ 묘사는 천종삼과 같은 것이다. 오직 그만이, 그의 묵은 빚 문서 같은 삶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나를 괴롭혔던 묘사 공포증 중 장면묘사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물간의 대화를 나열해야 ‘장면 묘사’가 되는 것이니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해야 하는 소설에서 대사 처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핍진감(逼眞感, 살아있는 듯한 느낌) 있는 장면 묘사를 위해서 살아있는 대사와 지문의 배치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지문이었다. 대사만 있고 지문이 없으면 희곡과 진배없는 일, 무슨 말로든 지문 칸을 채워야 했는데 그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나름 해법을 찾았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출구는 되었다. 이를테면, 지문에다 대사의 임무를 조금씩, 혹은 아주 많이, 위임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대사를 평가하고(설명과 논증), 독백체로 이런 저런 대화 상황도 가정해 보고(묘사), 앞으로 사건이 진행될 방향을 예측해 보는 것(서사) 등으로 자연스럽게 지문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독자들도 그 정도의 ‘장르적 자유’는 눈감아주는 듯했다. 「눈길」에서도 그런 지문 활용이 돋보인다.   

  

“그래도 한 며칠 쉬어가지 않고…… 난 해필 이런 더운 때를 골라 왔길래 이참에는 며칠 좀 쉬어갈 줄 알았더니…….”

 “제가 무슨 더운 때 추운 때를 가려 살 여유나 있습니까.”

 “그래도 그 먼길을 이렇게 단걸음에 되돌아가기야 하겄냐. 넌 항상 한동자(식후에 새로 다시 밥을 짓는 일-인용자 주)로만 왔다가 선걸음에 새벽길을 나서곤 하더라마는…… 이번에는 너 혼자도 아니고…… 하룻밤이나 차분히 좀 쉬어가도록 하거라.”

 “오늘 하루는 쉬었지 않아요. 하루를 쉬어도 제 일은 사흘을 버리는 걸요. 찻길이 훨씬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기선 아직도 서울이 천릿길이라 오는 데 하루 가는 데 하루…….”

 “급한 일은 우선 좀 마무리를 지어놓고 오지 않구선…….”

노인 대신 이번에는 아내 쪽에서 나를 원망스럽게 건너다보았다.

그건 물론 내 주변머리를 탓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내게 그처럼 급한 일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서울을 떠나올 때 급한 일들은 대충 다 처리해둔 것을 그녀에겐 내가 미리 말을 해줬으니까그리고 이번엔 좀 홀가분한 기분으로 여름 여행을 겸해 며칠 동안이라도 노인을 찾아보자고 내 편에서 먼저 제의를 했었으니까그녀는 나의 참을성 없는 심경의 변화를 나무란 것이었다그리고 그 매정스런 결단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었다까닭없는 연민과 애원기 같은 것이 서려 있는 그녀의 눈길이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래, 일이 그리 바쁘다면 가봐야 하기는 하겠구나. 바쁜 일을 받아놓고 온 사람을 붙잡는다고 들을 일이겄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앉아있던 노인이 마침내 체념을 한 듯 다시 입을 열어왔다.

“항상 그렇게 바쁜 사람인 줄은 안다마는, 에미라고 이렇게 먼길을 찾아와도 편한 잠자리 하나 못 마련해주는 내 맘이 아쉬어 그랬던 것 같구나.”

말을 끝내고 무연스런 표정으로 장죽 끝에 풍년초를 꾹꾹 눌러 담기 시작한다.   <이청준, '눈길'>

  

밑줄 친 지문 부분에서 작가는 아내의 말을 평가하고 앞으로 그녀가 사건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암시하고 있다. 지문이 단순하게 대사의 부속품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대화 장면 전체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현실적인 대화 관계 속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분석과 종합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대목을 보면 화자 주인공은 이미 모든 등장인물의 역할을 상세히 알고 있다. 전지적 작가가 장면 속의 인물로 들어와 있는 형국이다. 이 소설 전반부에 놓인 이 장면 묘사는 아직 이들의 ‘상처(傷處)’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본격적인 수수께끼 풀기로 진입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둘 만의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비밀을 엿보고 있는 며느리는 독자들을 대신해서 윤리의 심판관으로 현장에 임하고 있다. 이 역시 ‘장르적 자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묘사에 소질이 전혀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간신히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포기는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게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묘사가 내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나서도 묘사의 계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초짜 심마니에게는 천종삼을 캐는 것이 쉽게 허여되지 않았다. 나이 들어 힘에 부쳐 소설쓰기를 멈추었을 때까지 내 안의 ‘묵은 빚 문서’는 종내 ‘불쑥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묘사를 못한다고 작단에서 서자 취급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작은 격려를 받은 적은 있었다. “이 작가는 묘사 없이 서사만으로도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존경하는 김윤식 선생이 분에 넘치는 격려를 해주신 적은 있다. ‘나’의 그릇 안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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