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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1.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여귀의 입김

낯선 여귀(女鬼)의 입김     

우리가 흔히 범하는 속단(速斷) 중의 하나가 ‘기교(기교파)는 저급하다’라는 선입견이다. 내용은 없고 겉만 화려한 것이 기교(기교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교약졸(大巧若拙, 큰 기교는 졸스럽다)이라는 말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 풍토도 그런 속단이 만연하는 것에 일조한다. 어디서나 큰 기술이 잔기술보다 좀 무뚝뚝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평생 익히는 기술이 글쓰기와 검도인데 그 두 분야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대교약졸을 실감한다. 그러나, 대교약졸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과 기교를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기교를 한참 익혀야 할 때에 대교약졸만 믿고 기교 공부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된다. 경지가 깊을수록 기교가 좀 더 단순해지고 투박 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교가 선행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말이고 현실이다. 기교 자체가 없는데 무슨 대교약졸이 있겠는가? 기교는 자신이 가진 기예를 정교화한 결과로 태어나는 것이다. 누구도 기교를 무시할 권리나 자격을 가질 수 없다. 

당연히, 기교는 단순히 그것만을 따로 익혀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 글쓰기의 기교는 더 그렇다. 단순히 보고 배우고(기예는 보고 배우는 것이 오 할이다) 오랜 기간 반복 수련을 한다고 해서 절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수련은 당연한 일이고 자신을 객관화하는 수행(修行)도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스스로 ‘기교를 부르는 절박함’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야 한다. 수련, 수행, 절박함.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면 기교에 실패할 확률을 확실히 줄일 수 있다. 좋은 선생에게 좋은 강의를 듣고 좋은 글쓰기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이 세 가지를 무시하면 대교약졸의 경지를 하는 프로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공부가 내 안으로 스며들지 않아서 그 모든 공부가 항상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매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잘 쓰여진 소설로 널리 알려진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우리의 두 번째 묘사 텍스트다. 「무진기행」은 남녀 두 주인공의 절박한 출구 찾기를 맛깔스럽게 그려낸 명작이다.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작가의 가까운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 기교파 소설이 낯설게 보여준 그 ‘절박함의 미학’에 대해 이십대 초중반의 명문대 문학도들로서는 아직 충분히 공감할 수가 없었던 처지였던 모양이다. 늪처럼 사람을 가라앉히는 가난의 굴레, 그것으로부터 몸을 빼내려면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팔아야 하는 천박한 현실, 먼저 영혼을 판 남자들이 그들 앞에 자신의 영혼을 싼 값에 내놓은 한 여자와 벌이는 안쓰러운 만남과 헤어짐을 이 소설은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내용은 그뿐이다. 그 속악스럽고 뻔한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은 기교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물들의 절박함으로 전이되는 작가의 절박함, 단단한 구성력, 탁월한 묘사 능력, 독자의 허를 찌르는 거침없는 독설 같은 것들이 이 소설의 공신(功臣)들이다. 「무진기행」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대목이 있다. 안개 묘사 부분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작가는 무진의 안개를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에 비유한다. 일단은 맛깔스러운 묘사다. 이 부분에서 ‘전율’을 느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대목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우선 ‘진주군’과 ‘여귀의 입김’이라는 말이 생각으로 만든 말이라는 느낌을 준다. 「눈길」의 ‘묵은 빚 문서’가 천종삼이라면 이것들은 장뇌삼이다. 효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손이 많이 탄 인공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두 비유가 모두 서양 말 어투라는 것도 좀 불만이다. ‘묵은 빚 문서’와 비교해 보면 담박에 알 수 있는 일이다. 안개를 ‘진주군’과 ‘여귀의 입김’으로 두 번씩 묘사하고 있는 것도 보기에 안 좋다. 그렇게 중언부언해야 하는 그 어떤 필연성도 찾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글의 응결성을 많이 해치고 있는 부분이다. 밑줄 친 ㉮와 ㉯를 찬찬히 비교해 읽어보면 나의 불만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안개 묘사 부분은 독자들에게 작중 인물들의 절박한 속사정을 본격적으로 알려주기 전에 미리 보여주기 식으로 그들이 처한 분위기를 암시하는 부분이다. 일종의 복선(伏線)인 셈이다. 창작과정에서도 그런 의식적인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개 묘사를 통해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암시하려는 의도가 표나게 노출되고 있다. 제목부터 ‘무진기행’이다. 무진(霧津)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면서 동시에 작중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은유하는 말이다. 그런데 무진의 안개 묘사 장면이 너무 과대평가되면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한다. 분위기 암시, 희미한 복선의 구실에서 그쳐야 할 이 대목이 저 자신 스스로도 독립된 하나의 ‘의미와 가치’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본말전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한 번 보여주고 ‘나중에’ 소설의 메시지 전달에 유용하게 한 번 써먹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의도는 온 데 간 데 없고 이 대목에 대한 찬양만 가득하다. 마치 소설의 문장은 다 그래야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대우받는 경우마저 생기게 되었다. 이를테면, 천고의 ‘한 문장’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절박함’의 전주(前奏)로 연주된 것인데 오히려 전주곡이 본 연주를 압도하는 형국이 되고 만 것이다. 작가나 등장인물들에게 절박한 문제였던 ‘출구의 문제’는 온 데 간 데 없고 오로지 ‘안개’만 있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되어야 할 부분은 ‘안개’와 ‘서울’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부분이다. 

     

...여자는 아까보다 좀 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절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서울에 가고 싶으신가요?” “네.” “무진이 싫은가요?” “미칠 것 같아요. 금방 미칠 것 같아요. 서울엔 제 대학동창들도 많고…… 아이,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어요.” 여자는 잠깐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렸다. 그러자 흥분이 가셨다. “그렇지만 이젠 어딜 가도 대학시절과는 다를 걸요. 인숙은 여자니까 아마 가정으로나 숨어버리기 전에는 어느 곳에 가든지 미칠 것 같을 걸요.”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그렇지만 지금 같아선 가정을 갖는다고 해도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정말 맘에 드는 남자가 아니면요. 정말 맘에 드는 남자가 있다고 해도 여기서는 살기가 싫어요. 전 그 남자에게 여기서 도망하자고 조를 거예요.” “그렇지만 내 경험으로는 서울에서의 생활이 반드시 좋지도 않더군요. 책임, 책임뿐입니다.” “그렇지만 여긴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인 걸요. 하여튼 서울에 가고 싶어요. 절 데려가 주시겠어요?” “생각해봅시다.” “꼭이예요 네?”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는 그 여자의 집 앞에까지 왔다. “선생님, 내일은 무얼 하실 계획이세요?” 여자가 물었다. “글쎄요. 아침엔 어머님 산소를 다녀와야 하겠고, 그리고 나면 할 일이 없군요. 바닷가에나 가볼까 하는데요. 거긴 한때 내가 방을 얻어 있던 집이 있으니까 인사도 할겸.” “선생님, 내일 거긴 오후에 가세요.” “왜요?”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오전수업뿐이예요.” “그럽시다.” 우리는 내일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는 이상한 우울에 빠져서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 이모 댁으로 돌아왔다. [김승옥 「무진기행」]   

   

소설의 두 주인공 윤희중과 하인숙은 ‘출구 찾기’를 공유하는 쌍둥이 인물이다. 자신의 속물적 삶을 고통스럽게 투시(透視)하는 윤희중과 안갯속의 삶에서 탈출하고 싶은 하인숙은 하인숙의 미래와 윤희중의 과거라는 의미를 각각 지닌다. 두 사람은 천상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제 고리를 물고 하나의 원을 그려낸다. 남자에게는 안개가 자신의 속악을 가리는 장막이었고 여자에게는 서울이 출구였다. 그 쌍둥이 인물은 무진(霧津, 안개(갯)마을)에서 만나 몸을 섞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확인한 후 헤어진다. 그들이 쌍둥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위의 장면 묘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미없는 두 사람의 대화 모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안개 묘사는 이 부분을 위해서 존재한다. 소설의 주제가 태동되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낯선 여귀의 입김에 지나친 환대를 보내는 것은 ‘기교(파)는 저급하다’라는 속단처럼 전제를 무시한 무식한 처사다. 대교약졸에 대한 근본 없는 맹신처럼, 인공의 기교가 만들어낸 낯섦에 덮어놓고 환호 작약하는 것은 기예를 익히는 자들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무엇이 중한가?”, 언제 어디서고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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