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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0. 2019

진득한 것들

부녀 갈등 소설들

진득한 것들     


살다 보면 여기저기서 진득한 것들을 만납니다. 송진도 진득하고, 꿀도 진득하고, 딸기잼이나 사과잼도 진득하고, 진하게 우려낸 고기국물도 진득하고, 미련을 남긴 옛날 애인 생각도 진득합니다. 하여튼 각종의 고아지는 것들은 다 진득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진득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 들면 너나없이 모두 진득해지지 않습니까? 

소설을 읽다 보면 유독 노인들의 진득한 삶을 누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묘사하는 대목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노인들은 오래된 상처나 기억을 놓지 못하고 끈질기게 그것들을 반추합니다. 또 이것저것 오래 끓이고 삶는 것을 좋아합니다. ‘고아지는 것들’ 곁에는 언제나 노인이 있습니다. 보통의 스토리텔링은 그런 진득한 것들을 젊은이의 시점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흐릅니다. 젊어서는 그런 대목들이 그리 큰 거부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그런 대목들이 점점 눈에 거슬립니다. 노인들은 역겨운 무엇인가를 계속 고고 있고 그런 노인과 함께 사는 딸이나 며느리는 그것을 미워하고 배척합니다. 부녀갈등의 도화선이 되곤 합니다. 그런 투의 부녀갈등 모티프는 거의 하나의 트렌드로 굳혀져 있는 느낌입니다. 오늘은 그런 반(反) ‘심청가’식 ‘부녀갈등’이 소재가 되고 있는(주제는 아닙니다) 두 편의 좋은 소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김숨)과 「저녁의 게임」(오정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 구릿빛 양은들통에서는 한 무더기의 오리 뼈가 고아지고 있었다. 오리 뼈에서 우러난 누리끼리한 기름이 둥둥 엉겨 떠올라 장판지 같은 막을 만들어내는 동안, 거실과 부엌은 차차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부엌 맞은편 꼭 닫힌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노인이 걸어나왔다. 제자리걸음을 해 현관 쪽으로 돌아서더니 두 발을 질질 끌면서 움직여 갔다. 고개가 쳐들려서 있어서인가 노인의 몸은 마치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듯 보이기도 했다. 현관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한순간 노인이 현관문 밖으로 지워지듯 사라졌다. 

현관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영숙이 식탁 의자에서 쑥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부엌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가스레인지 화력을 최대한 미약하게 줄여놓아, 들통 속 오리뼈 국물은 뭉근하면서도 집요하게 고아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고요하고 끈덕지게 지속되는 노인의 일상처럼, 노인이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하는 일이란 오리 뼈를 고고, 전기문이나 성경을 필사(筆寫)하거나 티브이 뉴스를 시청하는 것뿐이었다. 날이 어둑해지면 노인은 슬그머니 방에서 나와 산책을 다녀왔다. [김숨,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2011 이상문학상 작품집』, 177 쪽]     


위의 소설에서 ‘고아지는 것’과 ‘노인’은 일종의 ‘객관적 상관물’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노인에게는 오리뼈 고는 일이 일종의 생명 활동입니다. 그러나 내적 화자(영숙)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잉여 활동일 뿐입니다. 노인이 ‘집요하게’ 자신의 생명(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화자는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누리끼리한’ 느낌이거나 ‘한순간에 지워지듯 사라’져야 하는 잉여적 존재감만 있을 분입니다. 물론 그것은 서사의 표층적 차원에서 읽혀지는 내용입니다. 심층적인 의미는 또 따로 있을 겁니다. 진득하게 우려낸 오리뼈 국물의 효험처럼 이 이야기도 푹 고아지다 보면 새로운 울림을 주는 심층적 의미를 배태(胚胎)하게 될 것입니다(이 소설을 지금부터 읽어볼 작정입니다). ‘고아진 것’으로서의 노인의 인생이 결국은 ‘우리 모두의 우주의 부스러기로서의 삶’을 드러내는 유용한 수단이 되거나 아니면 예상 못한 스토리 반전의 결정적 수단이 되거나 할 것입니다. 보통 이야기 속 노인(들의 행동)은 처음에는 시대착오적이거나 편벽된 고집의 소산으로 인지되다가 어느 순간에 노현자(老賢者)의 그것으로 탈바꿈합니다. 대중적인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써 먹는 반전의 단골 소재 중 하나입니다. 만약 그런 반전의 묘도 살리지 못한다면 이 소설의 위와 같은 서두는 잘못 쓰여진 것일 공산이 큽니다. 그런 의미화의 의도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저렇게 비중을 두고 ‘고아지는 것’과 노인을 한데 묶어서 소설의 서두를 장식하는 것은 그야말로 ‘알쓸신잡’, 쓸데없는 짓입니다. 노인과 ‘고아지는 것’은 ‘노현자(老賢者)와 연금술(鍊金術)적 수행’의 관계로 이해되는 것이 글쓰기 전통에서의 상식입니다. 특히 소설에서는 그렇습니다. 노인의 ‘달이거나 고는 행위’에 대해서 화자가 어떤 평가를 내리든. 소설의 리얼리티 안에서는, 그 행위는 일종의 주술적 가치를 지닌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달(未達)이거나 패착이 될 공산이 큽니다.

     

...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 밥물이 끓어넘친 자국을 처음에는 젖은 행주로, 다음에는 마른 행주로 꼼꼼히 문지르며 나는 새삼 마루와 부엌을 훤히 튼, 소위 입식(立式) 구조라는 것을 원망하는 시늉으로 등을 보이는 불안을 무마하려 애섰다. 그래도 가스렌지 주변의, 흘리듯 점점이 뿌려진 몇 점의 얼룩은 여전히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다. 아마 지난 겨울 아버지가 약을 끓이다가 부주의로 흘린 자국일 것이다. 승검초의 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 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 거품으로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어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된 그것을 겨우내 장복하며 아버지는,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단다라고 말했었다. 실내의(室內衣) 바람으로 군용 창고에 콜타르처럼 꺼멓게 엉기는 액체를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아버지는 영락없이 중세의 연금술사였다.

약을 달이는 동안 내내 누릿하고 매움한 냄새는 집안 곳곳에 스며들고 비단개구리의 살과 뼈는 독한 연기로 피어올라 마침내 낙진처럼 무겁고 끈끈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빈혈증과 구역질로 헐떡이며 건성의 피부에 더럽게 피어나는 버짐과 잔주름으로 거울 앞에 매달렸다. 얼룩은 변질된 스테인레스로 기억보다 독하고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오정희, 「저녁의 게임」, 『오늘의 한국소설』 183~4 쪽]     


인용된 두 편의 소설에서 화자 주인공들은 공히 ‘고아진 것, 그래서 진득한 것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증오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들’의 부정적 이미지가 그것을 통해 대리 표현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며느리(「아무도…」)나 딸(「저녁의 게임」)은 아버지가 등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조차도 끔찍이 싫습니다.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라고, 자신의 뒷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게 하는, 가릴 데 없이 탁 터진 입식 부엌에 대해서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물론 이때 ‘아버지’는 실존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삶을 구속하는 오래된 율법 일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그런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나도 모르는 나’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이런 소설들의 ‘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두 편의 소설을 비교해 보면(서두 부분만) 후자 쪽이 전자 쪽보다 글의 짜임이 조금 더 촘촘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아마도 화자의 주관적 진술(불안한 내면)이 요소요소 장면(공간)묘사의 빈틈을 메우고 있는 덕분인 듯합니다. 전자 쪽도 조금 더 이야기가 진행되면 글의 짜임새가 한결 모양새를 갖추게 됩니다. 

    

... 그녀는 현관 쪽을 흘끔 바라본 뒤, 국자로 들통 속을 휘저었다. 장판지가 찢기듯 기름이 엉겨 만들어진 막이 찢어졌다. 누리끼리 하다못해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국물 위로 늑골과 목뼈, 엉치등뼈 등속이 삐죽삐죽 악다구니 치듯 올라왔다. 그녀는 국자로 뼈들을 꾹꾹 눌러 들통 바닥으로 가라앉힌 뒤, 국자 그득 오리 뼈 국물을 떴다. 국자 속 국물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노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타원형의 오목한 국자 속에 담겨 있어서인가, 노인의 흐려터진 눈동자가 국자 속에 그렁그렁 괴어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녀는 국자를 들통 속에 내던지듯 처박았다. [김숨, 위의 소설, 위의 책 184쪽]     


두 소설 모두에서 화자는 ‘노인의 시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전자는 며느리, 후자는 딸입니다). 왜 그렇게 ‘노인(노인이 된 아버지)’들이 딸들에게 배척되고 있는지 자세한 사정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노인은 젊은 딸이나 며느리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고 영악스러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면 ‘기존의 관습’과 ‘삶의 본질인 추(醜)와 악’이 절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생의 허전함, 그 ‘허전한 한 목숨’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위의 두 소설을 쓴 소설가들이 젊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소설 집필 때의 나이를 말합니다). 젊을 때는 누구에게나 ‘고아진 것, 그래서 진득한 것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만사 날 것 채로 먹어야 제 맛이라고 여깁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한 것처럼, 우리네 고달픈 인생에서 평생을 두고 ‘달이고 고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를 묻는 일은 어쩌면 그들 몫이 아닐 수도 있는 일입니다.   

  

소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을 다 읽었습니다. 소설의 서두만 보고 지레 짐작을 늘어놓는 습벽(習癖)이 나쁜 버릇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공들여 쓴 ‘남의 작품’에 대한 결례가 됨은 물론이고, ‘오해와 편견’에 가득찬 독서가 될 공산이 큰 몹쓸 버릇입니다. 그러나 좋은 점도 하나쯤은 있습니다. 내 오해와 편견을 입증시키기 위해(혹은 부정하기 위해) 작품과(스스로와) 싸우는 투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합니다. 꼼꼼하게, 문장 하나하나를 새기면서,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재미가 점점 배가되는 소설이었습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에 혼자 집을 지키는 불안한 임산부의 심리가 잘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저녁의 게임」처럼 충격적인 반전은 없었지만, 출구 없는 일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억압(폭력)’을 그런대로 잘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이만한 소설 하나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저도 명색이 소설가였으니까 모를 일 없겠습니다. 

최근에 들어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읽어봐야 되겠습니다만 현재의 제 느낌으로는 ‘진득한 맛’이 옛날보다 훨씬 덜한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니 저도 젊어서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어중간한 나이에 중도탈락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끝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중간하게 ‘보이는 것’만 보는 눈으로는 ‘인간만의 승리’(내용)도 ‘제목에 이기는 글’(형식)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진득하게, 오래 한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것의 끝을 보는 안법(眼法)’을 길러야 합니다. 그야말로 ‘끝을 본다’는 심정으로 ‘오늘의 글’을 써야 합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끝을 보기로 작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작 아류로 끝나거나 중도탈락하는 비운(행운인지도 모르겠습니다)을 겪습니다. 우리 후배 작가들은 소설 「저녁의 게임」이 보여주는 ‘끝’이 왜 우리를 전율케 했는지를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악(惡)’이 고작 노추(老醜)에서 머물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우주의 섭리’라는 것을(「저녁의 게임」에서 보여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 나는 찬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가 아직 방에 들어가는 기척이 없다는 걸 떠올리며 나는 빈 집에서처럼 스커트를 끌어 올리고 스웨터도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렸다. 자박자박 여전히 아이를 재우는 여자의 발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세상에서 귀한 아기. 나는 누운 채로 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은 조용한 어둠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 전체가 수렁 같은 어둠 속으로 삐그덕거리며 서서히 잠겨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침몰하는 배의 마스트에 꽂힌, 구조를 청하는 낡은 헝겊 쪼가리처럼 밤새 헛되고 헛되이 펄럭일 것이다. 나는 내리누르는 수압으로 자신이 산산이 해체되어 가는 절박감에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문득 사내의 성냥 불빛에서처럼 입을 길게 벌리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오정희, 「저녁의 게임」, 『오늘의 한국소설』 196 쪽]     


「저녁의 게임」은 한 편의 계시록입니다. 자의식 강하고 내성적이던 주인공은 작품 후반에 들어서면 갑자기 독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느닷없이 밖으로 나가 ‘빈 집’에서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야합(野合)을 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위의 장면은 야합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자기 방에 누워서 그 장면을 재차 반복하는 모습입니다. 무엇인가 ‘원초적 장면’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아직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 보란 듯이 그 사내와의 야합 장면을 재연합니다. 스스로를 ‘구조를 청하는 낡은 헝겊 쪼가리와 같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런 ‘끝’을 보여줍니다. 그 ‘끝’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아마 평범한 ‘출구 찾기’ 소설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괴물과 싸우다 나도 괴물이 되었다’ 정도의 어중간한 수준에 걸터앉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어중간한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아주 끝까지 가서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끝내 진득한 그 무엇을 우리에게 만지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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