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Apr 21. 2019

앞발꿈치에 힘을 주니

주역, 택천쾌

앞발꿈치에 힘을 주니     

오랜만에 <음식남녀>(1994, 이안)를 봅니다. 학교에서 ‘영상매체의 문학적 이해’라는 수업을 맡고 있어서 지나간 영화도 가끔씩 찾아서 봅니다. 가급적이면 몇 편 연결해서 공부할 수 있는 학습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가령 <써머스비>와 <글루미선데이>, <검우강호>와 <무협> 같은 영화를 묶어서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몸’, 그리고 사랑(헌신적인) 가족(불패의)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다는 식입니다. 이번에는 ‘먹고 입고 사는(거주하는)’ 영화들을 묶어서 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남녀>, <미나미양장점의 비밀>,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 같은 영화들이 일단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음식남녀>의 도입부의 요리 장면은 여전히 화려합니다. 가볍고 명랑한 소리들과 함께 하는 요리의 영상미가 눈부십니다. 가슴까지 설레게 합니다. 먹기 위한 살생(殺生)은 저렇듯 아름답기까지 하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합니다. 요리가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장면 장면이 다른 생각이나 다른 소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감독의 의도만 존재합니다. 그런 수준에서는 영화는 일종의 마술입니다. 시각을 희롱하고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합니다. 등장하는 여배우들도 요리만큼 아름답습니다. 오래 전의 인물들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젊어 보입니다. 아마 그 부분은 (영화 외적인) 시간의 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그만큼 늙었다는 거겠지요. 주인공 주사부(師父)가 아마 제 나이 정도일 것 같습니다.     


남녀 불문, 나이 불문, 직업 불문하고 ‘음식남녀’를 도외시하고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음식남녀, 식색(食色)은 존재의 기본 조건입니다. 그것과 멀어지면 이미 사는 의미와 사는 재미의 절반은(거의 모두?) 잃는 셈입니다. 그렇게 보면 주역은 인생의 절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실패하지 않는 법, 후회하지 않는 법, 허물을 남기지 않는 법, 싸워서 이기는 법, 동지를 간별하는 법, 나갈 때를 아는 법, 상황을 파악하는 법 등을 주로 이야기하지 식색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식색 이외의 것들에는 관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실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한 세상에서 살면서, ‘승리의 징표’로 남다른 식색을 누리고 싶어하는 이들도 다수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소수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주역의 가르침도 한갓 주사부의 생선요리 한 점에도 못 미치는, 영양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초구는 앞발꿈치에 힘을 주니, 가면 이기지 못하며, 허물이 되리라. (初九 壯于前趾 往不勝 爲咎) 

상전에서 말하기를, 이기지 못하는데 가는 것이 허물이라. (象曰 不勝而往咎也)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333쪽]     


주역 마흔세 번째 ‘택천쾌’(澤天夬), 쾌괘(夬卦)에서는 초구(初九) 효사(爻辭)가 눈에 들어옵니다. ‘앞발꿈치에 힘을 주다’(壯于前趾)가 인상적입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의욕이 과하여 자신을 돌아다보고 때를 살피는 기회를 잃게 되는 ‘실패하는 형국’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검도 수련에서도 ‘앞발꿈치에 힘을 주다’(壯于前趾)는 절대 금물입니다(물론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앞발은 방향만 잡고 체중을 뒤에 싣는 ‘뒷발에 힘주기’가 강조됩니다. 앞발에 체중이 실리면 적기에 몸을 실어서 앞으로 치고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우족우수(右足右手), 중단세, ‘까치발’을 기본으로 하는 검도의 기술 패턴 상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를 먼저 치고 나가는 데에는 그것 이상의 방법이 없습니다. 펜싱도 마찬가지고요. 전심전력 자신의 몸을 던져서 상대를 치려면 ‘장우전지(壯于前趾)’는 절대 금물입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내세우지만 그 내막은 ‘장우전지(壯于前趾)’에 불과한 것이 정치의 속살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때로는 한 나라의 정치가 <음식남녀> 영화 한 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정치도 영화처럼 편집된 장면만 잘라 보여주는 눈속임 마술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멋진 요리처럼 식재(食材)들의 조화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는 ‘불의 예술’이기도 하다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요즘은 그런 멋진 장인(匠人), 예술가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감쪽같은 마술이나 불의 예술은커녕, 정치판이라는 것이 마치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거리의 상인들에게 자릿세나 뜯는 불량배들의 놀음터 같습니다. 주사부 같은 요리 예술가나 이안 감독 같은 영상의 마술사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앞발꿈치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못된 불량배들만이라도 좀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진득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