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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8. 2019

아버지와 아들

햄릿2

아버지와 아들(햄릿 2)  

   

버킷 리스트(bucket list)란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이라고 한다. 몰랐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버킷’이 옛날 우리가 ‘바게쓰’라고 부르던 물통인 모양이다. 교수대의 사형수들이 그것을 밟고 올라서 있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생긴 모양이었다. 좋은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좀 찝찝한 역사(민간어원)를 지니고 있는 말이었다. ‘바게쓰’는 우리가 어린 시절 집안의 생필품이었다. 상수도 시설이 미비했던 당시에는 여기저기 쓰이는 곳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많이 쓰였다. 청소 도구로는 물론이고, 구호 물품으로 제공되던 우유(분유)도 그것에 담아 날랐다. ‘바게쓰’란 외래어는 그래서 정든 옛 친구 느낌을 준다. 

나는 장난삼아서 일부러 그런 옛말(일본어 발음의 외래어)들을 자주 입에 담는다. 주로 집안에서지만, 나의 그런 행색에 식구들은 질색을 한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난닝구, 빤쓰(사루마다도 가끔씩 쓴다), 우와기, 즈봉, 네꾸따이, 벤또, 다마네기, 다꾸앙, 아지노모또, 와루바시, 사라(접시). 오봉(쟁반). 생각나는 대로 막 쓴다. 그럴 때마다 식구들은 명색이 ‘국어 선생’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쏘아붙인다. 그래도 나는 재미있다. 그런 우국적인 저항이 올 때는 일부러 “모찌방이 왜 그 모양이냐, 얼른 씨다이나 쪼우자(밥 먹자).”라는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배운 말까지 해버린다. 이판사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옛날의 일들을 내 기억 속에 붙들어 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고질이다. 

각설하고, 정진홍 선생의 이런 저런 독서 감상문을 읽다 보면 문득 문득 ‘글쓰기 버킷 리스트’가 생각날 때가 있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다.     


... 그런데 오랜 뒤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초등학교 4학년 때 물에 빠져 죽은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던 그 친구는 홀어머니를 모신 외아들이었는데 동네 방죽에서 멱을 감다 익사했습니다. 넋을 잃은 어머니가 물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땅을 치며 울었고, 무당은 시체를 건져 올린 뒤끝에서 넋을 마저 건지겠다고 밥이 담긴 주발그릇을 물에 넣고 굿을 했습니다. 나중에 밥이 담긴 그 그릇 안에 죽은 친구의 머리카락이 담겨 있었다고들 이야기했지만 제가 직접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이 일이 생각나면서 『햄릿』을 서둘러 뒤진 것은 ‘기억의 작희(作戱)’라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마침내 찾아 읽은 대목은 5막 1장의 첫 부분, 어릿광대의 대사입니다.     

“잠깐만 내 말 들어줘, 여기 물이 있네, 됐지? 여기 사람이 있네, 됐지? 만약 이 사람이 이 물까지 와서 빠져 죽는다면, 그건 의사여부 없이 그 사람이 자작 가서 죽은 거야. 알겠나? 그렇지만 만일 물이 사람한테로 와서 그를 빠뜨려 죽였다면, 그것은 자작 빠져 죽은 것은 아냐. 그런고로 자살죄를 범하지 않은 자는 스스로 목숨을 줄인 것은 아니야.”     

이 구절을 읽었던 제 기억이 제게 강요한 것은 어쩌면 그 친구가 자살하지 않았나 하는 갑작스러운 궁금증을 푸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죽음 이후 줄곧 그 친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제가 생각한 까닭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그 친구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찾아 읽으면서 저는 비로소 그 친구가 죽은 까닭을 풀어낸 것 같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제 짐작에 이서(裏書)를 받은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저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이 책을 처음부터 되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새삼 발견한 것은 이 책의 대사들이 담고 있는 철철 넘치도록 많은 ‘아포리즘 aphorism’이었습니다. [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은 울림』]     


나는 이 대목을 두고, 결국 선생의 『햄릿』 재독(再讀)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물에 빠져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졸저, 『코드와 맥락으로 문학읽기』). 그러한 “투사적 독서 행위는 ‘우연한 깨달음이나 터득’을 위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숙성된 ‘자기 이해’의 일반적인 자기표현 방식이다. 그런 까닭에 ‘텍스트의 (우연한) 방문’ 혹은 ‘텍스트와의 조우’라는 독서 행위의 동기가 특별히 강조되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이 ‘틀’이기 때문이다. 주체 텍스트는 항상 ‘문득, 갑자기, 우연찮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상 텍스트를 다시 만났다고 기록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자기 이해’의 숙성 단계를 기다려, 이미 준비된 목록을 펼쳐들고, 텍스트는 ”왜, 그 때는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면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썼었다. 항상 내 앞에서 나를 앞서 가던 친구의 죽음에서 말 못할 죄의식을 느끼고 있던 어린 자아는 훗날 그 죽음을 친구가 ‘자작’ 선택한 것임을 재독 텍스트를 통해 확인 받는다. 그런 죄의식에 빠져서 “나도 자살하고 싶다.”와 같은 엉뚱한 생각은 이제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다짐한다. 어릿광대의 궤변이 ‘희열’로 다가왔다는 것만 말할 뿐이지만, 그동안 어린 독자가 겪어야 했던 기니긴 악몽의 세월이 눈에 선하게 밟혀온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인데, 선생은 마치 버킷 리스트의 한 목록을 실행이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기억의 작희’를 꺼냈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반에서 1등을 하던 친구가 여름 방학 때 교회의 하계 수양회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생겼다. 그 친구가 가고, 학년 말 고사에서 우연찮게 내가 1등을 했다. 담임선생님이 나보고 나와서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라는 주제로 발표(성공사례)를 하라고 했다. 만약 다른 친구가 1등을 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시 세끼 챙겨먹기도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집안의 아이들을 다 젖히고 1등을 한 내가 선생님이 보기에 기특했던 모양이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을 그때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고 내려왔을 건데 그때는 그런 말이 없었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방학 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 설 이유가 없었다는 생각만 그득했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못하고 그냥, 자취생인데 밥할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그렇게만 말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날 밤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는 그 친구를 잊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담임선생님의 아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고등학교 입시를 봤다가 떨어져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작은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낮에는 재수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습반 강의를 하고, 밤에는 ‘정예반’이라는 재학생 중심의 국영수 종합단과반 강의를 했다. 보습반 강의는 그저 모양새만 갖추는 정도였다. 밤 수업에서 주로 돈을 벌었다. 그 학원에 일주일에 두어 번 낮에 오시는 영어 선생님이 계셨다. 풍채도 좋으셨고, 기독교 분파 중의 하나인 것만 아는데, 그 교단의 한국 총책임자시라고도 했다. 젊은 원장도 꼭 은사 대접을 해 드렸다. 나를 특히 귀여워하셨는데, 내가 점심 때 시키는 메뉴를 두고 한 말씀씩 하시곤 했다. 전부 다 짜장면을 시킬 때 혼자서 우동을 고집한다거나(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때 고모님이 중국집을 하셔서 틈틈이 거기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터라 그쪽 메뉴에 일가견이 있었다), 어떤 이는 아예 이름도 모르는 마파두부밥 같은 것을 간혹 시킨다거나 하는 것을 보고 “멋쟁이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같이 지냈는데, 하루는 그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물기가 촉촉하게 묻어나는 걸 우연찮게 보고 말았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 고등학교 입학연도를 물었던 것도 기억해 냈다. 직감적으로,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나중에 조용히 원장에게 확인했더니 맞다는 거였다. 바로 그 친구의 아버지셨다. 고등학교 때 교회 하계수양회에 가서 세상을 버린 그 친구의 아버지셨다. 그러나, 그 선생님(아버님)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사실을 알고 난 바로 며칠 뒤 ‘재학생 학원 출입금지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80년 서울의 봄이 막을 내리고 신군부가 전면에 나설 때의 일이다. 그래서 정예반 위주로 운영되던 학원도 부득불 문을 닫았고 그 선생님(아버님)과도 만날 일도 없어져 버렸다.     

 

또 한 분의 선생님(아버님), 고1때의 담임선생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선생님께서 몇 년 전 내게 연락을 주셨다. 회고록을 집필하셨는데, 좀 다듬어서 책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원고를 받으러 댁으로 찾아뵈었다. 아내와 함께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선생님이 우셨다. 선생님 댁을 나와서 선생님 사정을 좀 잘 아는 친구에게 저간의 근황을 물었다. 선생님의 아들은 1년을 재수해서 우리학교에 입학했다. 1년 후배가 된 것이다. 그 친구도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대구 지하철 공사장 폭발 사고 때 사망했다. 현장 부근의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출근길에 학생들과 함께 사고를 당했다. 그때 사망자 명단에 교사가 한 사람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우리집도 바로 그 뒤에 있었기에 온 집 유리창들이 흔들리고 야단이 났었다. 나중에는 우리집 뒤 언덕에 위령비도 세워지고 해서 그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터였다. 바로 그 친구가 선생님(아버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책을 내시고 바로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이라 남의 아들, 남의 딸들을 많이 본다. 이것저것 가르치면서 그 속내를 살피면 내 새끼보다 어여쁠 때가 많다. 물론 미운 애들도 간혹 있다. 그러나, 내 선생 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에 아홉은 집아이들보다 더 귀엽고 대견스럽다. 간혹 내 어릴 때처럼, 빠듯한 집안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구김살 없이 밝고 씩씩하게 자기 앞을 헤쳐 나가며 커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어여쁘다. 그 아이들을 보다가 집아이들을 보면 괜히 미워질 때도 있다. 집아이들이 섭섭해도 할 수 없다(남의 아버지 앞에서는 잘 할 것이라 믿는다). 선생님(아버님)들이 나를 보고, 왜 그렇게 귀여워하고, 또 왜 그렇게 우셨는지, 예전에는 속속들이 몰랐다. 동년배의 아들을 둔 인지상정이었거나, 아들을 잃은 쓸쓸하고 애잔한 아비 마음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요즘 와서야 그걸 좀 알겠다. 동병상련을 넘은 어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생긴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자식들을 키워내며 그 나이의 아버지가, 그 입장의 선생이 되어 보니 알겠다. 그 선생님, 그 아버님을 생각하며, 이런 글을 쓰면서, 내내 코를 훌쩍이고 있는 것을 보니, 스스로도 그걸 안다는 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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