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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7. 2019

사느냐 죽느냐

햄릿

사느냐 죽느냐     


예나 제나 사람이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곧잘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진(自盡)이다. 스스로 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도 꽤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햄릿』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살아 있는’ 우리의 ‘공부’를 요구하는 텍스트다. 식자(識者)치고 햄릿의 유명한 독백 ‘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3막 1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아마 그런 일에 마음 깊이 동병상련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산다는 것의 그 깊고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을 시켜 그 유명한 대사를 절실하게 외우게 한다.     

몇 년 전 우연히 그 대목이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되어 있는 책을 보았다. 중역을 배제하고 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꾀했다고 선전되던 모 출판사의 세계문학대전집에서였다. 일단 반가웠다. 그게 바로 고등학교 때 그 대목을 처음 보고 내가 했던 해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정통 종합영어’나 ‘천이백제’ 같은 영어 참고서에서였던 것 같다 같다.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 정답은 어디까지나 ‘사느냐 죽느냐’였다. ‘Be 동사’가 때로는 그렇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용례로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 전의 오답이 책임 있는 번역가에 의해 멀쩡하게 ‘신번역’으로 등장하고 있었으니 내심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햄릿 :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苦海)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 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후략] [세익스피어(최종철), 『햄릿』]     


아니나 다를까. 역자는 자신의 번역이 그동안의 정론적 번역을 마다하고 아직 역사적 무게가 덜 실린 우리말 ‘있음’과 ‘없음’을 사용하고 있는 소이를 자세히 밝히고 있었다. 그에게도 그 대목이 좀 화두였던 모양이었다. 그의 말로는 그 대목(To be, or not to be)이 나오는 문맥은 ‘사느냐 죽느냐’를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죽느냐 사느냐’라는 생사 선택의 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오히려 편협(미흡)한 번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to be’ 부정사의 명사적 용법을 고려할 때 그렇다는 거였다. 듣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것과 거의 같았던 것 같았다. 살다보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자주 만나는 법, 우연찮게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또 우연찮게 종교학자 정진홍 선생의 『햄릿』 독서 감상문을 읽다가 또 생각이 바뀌었다. 오래된 정답들에는 반드시 그것을 지탱하는 그 무엇이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데 많은 시간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희곡인 탓도 있지만 양이 절대적으로 많지 않았습니다. 대사가 무척 ‘화려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것이 그리 ‘심오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든 읽지 않은 사람이든 즐겨 입에 담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 곧 3막 1장에 나오는 ‘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도 그랬습니다. 제가 지금 펼쳐놓고 있는 최재서 선생님의 텍스트에는 이 문장이 ‘살아 부지 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중략]

저는 어쩌면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유치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이지만 제게는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시 다듬는다면 ‘살고 싶어 사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어 죽는 것도 아닌 것’이 삶이라는 건데, 그때 부닥치는 것은 그처럼 심원한 물음이 아니라 바로 그 다음의 구절,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고/ 참는 것이 장한 정신이냐./ 아니면 조수처럼 밀려드는 환란을 두 손으로 막아,/ 그를 없이 함이 장한 정신이냐? Whether'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opposing end them?’ 하는 더 현실적인 물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모욕을 당하면서 가정교사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오갈 곳이 없어도 오늘 저녁 돌아가면 당장 짐을 싸서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 제게는 ‘근원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독백이 이어지는 ‘죽는 일은 자는 일, 다만 그뿐이다. To die : to sleep’을 저는 거침없이 간과했습니다.[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은 울림』]   

  

선생은 자신이 젊어서 봤던 그 시시한 번역들이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말한다. 스무 살의 고된 현실이 고전 명작의 심오한 대사를 그냥 지나치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내게도 갑자기 빛이 들었다. 선생도 그렇게 운을 떼고 있었지만, ‘죽는 일은 자는 일, 다만 그뿐이다’라는 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는 말, 그 두 마디를 놓고 볼 때 그 대목은 강한 타나토스(죽음 충동)의 유혹을 말하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살고 죽는 것을 선택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고 싶다고 외치고 있는 거였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대면한 자에게 엄습해 오는 거역하기 힘든 죽음에의 유혹을 햄릿은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최재서의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라는 번역이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도 거두어 내면서 햄릿의 ‘죽음 충동’도 적절하게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도 있는 거였다. 아니, 그것도 ‘죽음에의 충동’을 늘어뜨리는 것이 된다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늘어진 표현이라면, 차라리 그저 ‘사느냐 죽느냐’가 백번 옳았다. 아무래도 ‘있음이냐 없음이냐’는 아니었다. 죽는 것 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옳았다.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더 아니었다. 그것들은 결국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같은 속된 선택의 수사와 진배없는 것들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모순과 억압에 직면한 , 자신의 죽음으로밖에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절체절명의, 살아있는 ‘인간의 절규’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것들을 그것 속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내 주제의 폭을 책의 주제가 넘어서지 못한다. 내가 가진 그릇이 작으면 책이라는 우물에서 퍼 올릴 수 있는 것도 적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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