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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6. 2019

아름답고 오랜 거게

이상화, 나의 침실로

아름답고 오랜 거게     

일전에 대구 수성못에 걷기 운동을 하러 나갔습니다. 못가에 크고 번듯한 시비 하나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허여멀건 바위에 빽빽하게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웅대하고 장엄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빼앗긴 들’이 절로 우리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올 것 같았습니다. 수성못 아래에 펼쳐진 ‘수성들’이 시에 나오는 바로 그 ‘빼앗긴 들’이라며 그렇게 그 장소에 시비를 세웠답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고 했을 때 그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이 수성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시인이 그 시를 발표할 무렵에는 대구 인근에 들이 많았습니다. 도심 지역일부를 제외하곤 주변이 온통 크고 작은 들 일색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몇 걸음만 도심을 벗어나면 누런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들판을 쉽게 볼 수 있었으니까요. 이상화 선생의 ‘빼앗긴 들’도 도심의 동쪽 수성들이 아니라 남쪽 앞산 밑의 보리밭 풍경일 것이라는 증언도 나온 바가 있습니다. 사방팔방 지천에 널린 것이 논밭이라 굳이 수성들만이 ‘들’이었던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곳이 가장 그럴듯한 ‘빼앗긴 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그저 환했습니다.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시비에 새겨진 「나의 침실로」와는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검은 돌에 새겨진 그 비뚤비뚤한 글씨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시비의 글씨가 당시 11살 된 상화 시인의 셋째 아들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 모르는 

나의 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이상화, 『나의 침실로』 중에서]     


50년 만에 다시 비문(碑文) 앞에 섰습니다. 주마등처럼 그동안의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절로 제 입가를 맴돕니다. 제 인생의 출발과 종착이 이 시비(詩碑)를 가운데 두고 한 줄로 나열되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이상화 시비는 대구시 중구 달성공원 안에 있습니다. 해방이 되고 우리 시인의 시비로는 처음 세워진 것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그 시비를 50년 전에 아주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마주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곁에서 수 년 간을 살았습니다. 학교를 갔다 오면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그 시비 아래 가서 가계를 도왔습니다. 좌판을 지켜야 했습니다. 소매도 하고 도매(들병이 아줌마들의 보급 창고였습니다)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시비를 지키고 서서 오랫동안 ‘아름답고 오랜 거게’를 꿈꾸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이런저런 공상으로 그 꿈을 채우곤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름답고 오랜 거게’는 역시 요원합니다. 뜻 모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는 처음 그 시비를 만났을 때의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도 다시 살아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사는 게 도통 ‘오리무중(五里霧中)’일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 사는지가 희미해질 때도 있습니다. 

늦은 오후, 지는 해를 멀리 두고 다시 이 시비 앞에 서니 안개가 좀 걷히는 느낌입니다. 시비에 새겨진 비뚤비뚤한 글자 모양도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글자체인지 의문만 잔뜩 들었습니다. 그 글자체가 그로테스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다시 그 시비 앞에 서니 그 비뚤비뚤한 모양이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비뚤비뚤’이 맞았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시인의 ‘간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탤 것을 찾았던 글쓴이가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옛날 그 어린 마음에도, 무심결에라도, 그 비뚤비뚤한 모양이 특별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 그런 내용과 그 모양이 피할 수 없는 어떤 관련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비뚤비뚤하게나마’ 전달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제가 지금 이 시비 앞에 서 있는 것이 그 ‘막연한 느낌’의 추동(推動)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이 사실일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저의 ‘비뚤비뚤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런 모양으로 새겨진 간절한 그 무엇이 바로 ‘아름답고 오랜 거게’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게 결국 우리가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아닌가 여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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