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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6. 2019

나그네가 먼저는 웃고

주역, 화산려

나그네가 먼저는 웃고      

‘타관살이 안 해 본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전에 ‘장소애(場所愛, topophilia)’라는 주제로 한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장소애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은 그렇게 타관살이의 애틋함을 토로할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디서나 나그네 처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낯설고 불안정한 일입니다. 언제나 서러운 감정을 예비하고 사는 일이지요. 고향 산천이 애틋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러한 절절한 나그네의 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이곳저곳 타관살이에 익숙해져야만 했던 처지에서(정작 고향 산천이랄 것도 없는 형편입니다) 굳이 장소애에 사무치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젊어서(어려서) 떠나온 곳들이 분별없는 짝사랑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아마도 말 못할 속병이라도 든 모양입니다.       

‘나그네 처지’도 사실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같은 나그네라도 자신을 나그네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그 처지가 많이 달라집니다. 스스로 나그네를 자처하고 ‘지나가는 자’의 역할에만 머무는 자에게는 그만큼 갈등의 소지가 줄어듭니다. 안팎으로 감정의 소비가 한결 적습니다. 이해를 함께 하는 자들과의 갈등도 한결 가볍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나그네 신세를 부정하고 매번 ‘주인의 자리’를 넘보게 되면 항상 불화가 싹틉니다. 그런 ‘역할 놀이’에서의 게임룰은 크게는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작게는 한 개인의 정체성 확정에까지 끈질기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특히 우리처럼 지역 연고와 문화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어디든 ‘나그네/주인’의 이분법이 엄존합니다. 그런 이분법의 세상에서 나그네와 주인의 자리가 바뀌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주역에서도 그런 이분법을 사용하는군요. 주인되지 않은 자의 일거수일투족에서 흉(凶)을 읽습니다.     

초육은 나그네가 자질구레하게 하니, 이는 재앙을 취하는 바이니라.

육이는 나그네가 머룰 숙소에 들고 노자를 가지며, 어린 종의 바름을 갖추도다.

구삼은 나그네가 그 숙소를 불사르고 그 어린 종의 바름을 잃으니 위태하니라. 

구사는 나그네가 처한 데에서 그 도끼를 얻으니 내 마음은 불쾌하도다. 

육오는 꿩을 화살 한 대로 쏘았으나 없어졌느니라. 마침내 영예스러운 명을 받게 되리라.

상구는 새가 그 집을 태우니, 나그네가 먼저는 웃고 뒤에는 울부짖느니라. 소를 쉽게 잃으니 흉하니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26~431쪽]     

주역 쉰여섯 번째 ‘화산려’(火山旅), 여괘(旅卦)의 효사는 보시다시피 나그네에 관한 것입니다. 타관살이에서의 지나친 나섬을 경계합니다. 두어 번의 인정을 받기는 하나 종내는 ‘울부짖을’ 것이라고 처신에 조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 당부 말씀이 아예 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제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를 주역에서 이렇게 만납니다. 고향이라 여기고 돌아왔지만, 이미 고향은 없었습니다. 그저 ‘나그네 처지’를 잊지 않고, 장소애를 함부로 남발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자중자애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한 번 흩어지면 다시는 모을 수 없는 것이 ‘나그네’로 타고난 자의 신세입니다.     

“여(旅)라는 것은 크게 흩어지는 것이니, 사물이 다 그 거하는 바를 잃는 때이다. 다 그 거처를 잃으면 사물이 기댈 바를 원하니 어찌 지혜 있는 자가 유위할 때가 아니리오?”(426쪽)라고 경문의 해설에서는 ‘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주인된 자들’, ‘군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나그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나그네들은 그런 ‘때’를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 주역의 당부입니다. “타관살이 하는 몸으로 아래에 베푸는 도를 행하니 대권을 침탈하는 싹이 동하는 것이다. 주인이 의심하므로 숙소가 불타고 어린 종을 잃으며, 자신은 위태롭다.”(428쪽)라고 구삼의 효사에서 경계합니다.     

한 번씩 드는 생각입니다만, 나그네를 자처하며 ‘살찌는 도망’에 충실한 것이 꼭 올바른 생활일까라는 자책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근심을 덜고 ‘집을 태우는’ 재앙을 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이 남아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 아닌가라는 잡념도 종종 듭니다. 특히 내 집을 태워서라도 후손들에게는 훨씬 더 좋은 새 집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 마음이 흔들립니다. 오늘 아침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꺼비에게 “헌집 줄 게 새집 다오.”라고 줄기차게 빌어 온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분명 나그네의 망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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