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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5. 2019

기러기처럼 나아가기

주역, 풍산점

기러기적절히 나아가는 것의 이로움   

  

동물 비유가 즐겨 사용되는 것은 효과적인 ‘교훈의 전달’의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을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주역도 그렇습니다. 동물 비유가 많이 나오는 괘사(卦辭)나 효사(爻辭)는 주로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주역 쉰 세 번째 괘인 ‘풍산점’(風山漸), 점괘(漸卦)는 좀 특별한 괘입니다. 주역 64괘 중 육효(六爻)의 효사가 전부 한 동물의 행색과 행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이 괘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이때의 ‘동물’은 기러기입니다. 기러기 동물 비유를 통해 ‘적절히 나아가는 것의 이로움’을 강조합니다. 기러기라는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성이 높은 존재를 표상합니다. 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표상합니다.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기러기를 내세운 육효의 설명이 ‘나아가고 들어감(자기를 지킴)’의 이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육효의 효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육은 기러기가 물가에 나아감이니, 소자(小子)에게 위태로워 말이 있으나 허물이 없느니라.

육이는 기러기가 반석에 나아감이라. 마시고 먹는 것이 즐거우니 길하니라.

구삼은 기러기가 산마루에 나아감이니 지아비가 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지어미가 잉태하여도 기르지 못하니 흉하니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로우니라.

육사는 기러기가 나무에 나아감이니, 혹 그 가지를 얻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구오는 기러기가 언덕에 나아감이니, 지어미가 삼 년 동안 애를 잉태하지 못하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니라. 길하리라.

상구는 기러기가 하늘로 나아가, 그 깃이 의표(儀表)를 삼을 만하니, 길하니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04~409쪽]     


점괘(漸卦)의 주인공 기러기는 ‘리더의 자질’, ‘처세의 요령’, ‘수신의 자세’ 등을 설명하는 보조관념으로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기러기가 처하는 공간이 ‘물가’, ‘반석’, ‘산마루’, ‘나무’, ‘언덕’, ‘하늘’ 등으로 나누어져 설명이 되고 있는데, 한 집단의 리더가 입신(立身)해서 출세(出世), 귀감이 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오(九五)의 효사 풀이가 재미있습니다. “능(陵)은 산마루 다음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운데 자리를 얻었으나 삼효와 사효에 막혀 그 응함과 합하지 못하므로 지어미가 삼 년을 잉태하지 못한다. 그러나 각기 바르게 행동하고 가운데에 거하니 삼효와 사효도 그 길을 오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삼년을 넘지 아니하여 반드시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나아가서 나라를 바로잡는다면 삼 년이면 될 것이요. 완성이 되면 도에 맞게 제도되므로 삼년을 넘지 않는다.”입니다(408~409쪽). 마치 작금의 정국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듯한 설명입니다. 봉건시대에 살았던 주역의 저자가 지금에도 적용될 법한 이른바 ‘기러기 리더십’을 이렇듯 자세하게 통찰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제가 기러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정식 단우가 되어 기러기 기장을 달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 보기가 참 좋았습니다. 며칠 전 존경하던 그 시절의 한 선배님을 한 모임(고교 동창회 100년사 집필진 회의)에서 뵈었습니다. 작은 기러기 한 마리를 꿈꾸던 그 시절이 생각나 잠시 수십 년 묵은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나이 들어 제 인생을 마무리를 할 때입니다만 아직도 제 가슴에는 기러기 한 마리가 날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에서 점괘(漸卦)의 주인공 기러기들을 자주 봅니다. 꿋꿋하게 ‘뚜벅뚜벅’ 정치 행로를 걷고 있는 젊은 리더들이 보기에 참 좋습니다. 모두 ‘적절히 나아가는 것의 이로움’을 아는 분들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모든 이들이 즐겁게 처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런 젊은 기러기들의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수천 년 전의 주역 집필자들도 이 세상이 누구에게나 ‘마시고 먹는 것이 즐거운(飮食衎衎)’ 곳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 소망을 담아 이런저런 기러기 이야기도 했을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기러기는 그 소망의 징표로 선택되고 있으니 복된 동물이라 하겠습니다.     

사족 한 마디. 우리가 음식 맛을 보면서 ‘간간하다(입맛 당기게 약간 짠 듯하다)’라고 할 때 그 ‘간간’이라는 말의 출처가 혹시 주역에 나오는 이 ‘간간(衎衎)’인가요? 각주에 보니 공영달은 이 ‘간간(衎衎)’을 ‘낙(樂)’이라고 했다고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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