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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04. 2019

풀은 반드시 눕는다

초상지풍의 의미

풀은 반드시 눕는다     


김수영의 시 「풀」에 보면 ‘눕는 것’으로 힘을 삼는 게 나옵니다. 시의 제목이 되고 있는 풀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 전체 중에서 “풀은 반드시 눕는다.”라는 명제와 관련된 내용이 총 9회 나옵니다. 그렇게 보면 시 「풀」은 온통 ‘눕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눕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 심상(다양한 내포)을 거진 다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풀이 눕는 행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바람이 불면 당연히 눕고, 누운 김에(울다가) 또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일어나기도 더 빨리 일어나고), 날만 흐려도 눕습니다. ‘눕기’를 업으로 삼는 바라 틈만 나면 눕는 것이 풀입니다. 마치 어떤 드라마에서 나온 대화처럼, 매일 매일이 날이 좋아 누울 뿐입니다. 김수영의 시 「풀」은 이렇듯 ‘날이 좋아 누울 뿐인’ 서민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서 ‘풀’이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풀」이라는 시가 서민(민중)을 대변하고, 서민의 어떤 ‘승리하는’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풀로 서민(민중)의 삶을 비유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김수영의 시 「풀」 이전에도 ‘초필언(草必偃, 풀은 반드시 눕는다)’이라는 말은 식자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곤 했습니다. 봉건(계급) 사회에서 풀과 바람의 대비는 신분상의 자질과 역할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메타포였습니다. 『논어』 안연(顔淵)편에 “군자지덕풍 소인지덕초 초상지풍 필언(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사(政)에 대해 물으면서, “만일 무도(無道)한 사람을 죽여 (나머지 다른 백성을) 도(道) 있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형(死刑)의 방법으로 정사를 도모하는가? 그대가 선하게 행하면 백성도 선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뒤에다 부연한 말이 바로 이 ‘초상지풍(草上之風)’입니다.     


페이스북에 실린 글 중에서도 그 메타포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김민호).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에서 읽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계급사회에서 보는 인간관계의 한 단면입니다.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對句)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이와 같은 서민들의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큰 쥐」(碩鼠)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신영복, 『강의』 중에서]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풀」은 이런저런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시는 언제나 단선적인 ‘선형적 서사구조’를 배척합니다. 다양한 울림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다양한 해석이 있다고 해서 나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한 번 우리식으로 읽어볼까요?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전문     


* ‘죽음’과 ‘그 죽음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랑’이 <풀>에 드러난 김수영 시 정신의 기본구조다. 김수영에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끝남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살아 있는 존재를 더욱 참되고 살찌게 하는 어떤 것이다.

* 풀의 생리와 운명이 일체의 군더더기가 배제된 거의 완벽한 언어경제에 의하여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풀이 상징하는 것은 「거대한 뿌리」에 등장하는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등의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풀을 반드시 버림받은 존재로 번역하여 읽을 필요는 없다. 

* 풀은 식물군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비천한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또한 모든 삶을 누리는 존재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의존하는 기초이다.

* ‘더 빨리’나 ‘먼저’라는 표현은 행위하는 주체자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풀이 상징하는 존재의 자유를 노래한 시이다.

* 이 모든 것은 하찮은 목숨 하나라도 결코 무시되지 않고 소홀히 되지 않게 지키고 돌보려는 시인의 깊은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 김수영이 「풀」과 같은 극히 상징적인 수준에서 표현한 작품에서는 거의 유감없이 시적 성취에 이르고 있는 반면, 역사적인 현실에의 관심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에서 부분적인 모호함이나 추상적인 진술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에, 그가 처했던 어떤 상황이 그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일정하게 제한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런 책임은 자신의 책임인지, 다른 어떤 책임인지 엄밀히 따져 볼 일인지 모른다. [이상, 김종철 「시적 진리와 시적 성취」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양한 해석들]   

  

「풀」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 바로 전에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시적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수작(秀作)입니다. 나약한 민중을 풀로 지칭하고 거친 세파(世波)를 바람으로 묘사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눕는 것들(눕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의 주체의식과 생생력(生生力)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물(微物)로서의 풀과 미력(微力)으로서의 서민의 삶을, 서로 마주 세워진 상태로(어느 한 쪽으로 수렴되게 하지 않고), 공감각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시로 여겨집니다. 음악성도 상당합니다.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그 클라이맥스에서, 듣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보다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시 해석은 인터넷 검색을 해 보기만 해도 상세하게 접할 수 있으니 주제넘은 설명은 여기서 그치기로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오늘 우리의 주제인 ‘초필언(草必偃, 눕는 것들)’에 대해서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수영의 시 「풀」은 ‘모시(毛詩)’의 전통을 이어받은 시입니다. 논어의 ‘초상지풍(草上之風)’을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김수영은 ‘공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눕는 것들’은 항상 위에서 ‘누르(고 얼르)는 것들’에게 복속(服屬)해야 한다는 ‘공자주의’에 배알이 꼴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세도 결국 그 ‘눕는 것들’의 처량, 비참함에 여지없이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있는 비굴에 대해 성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굴의 대명사, 약자의 표상’인 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빨리’나 ‘먼저’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지니는 말이 됩니다. 용기도 되고 비굴도 됩니다. 시인 자신이고 민초들입니다. 시가 단선적인 서사구조를 가지지 않는 것은 시인이 본디 거짓을 고(告)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東風)’은 오직 ‘눕는 것들’을 눕게 하는 힘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양풍(洋風)이 동쪽에서 왔다는 설명도 구차합니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도 그저 이중성일 뿐, ‘눕는 것들’로 산다는 것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닙니다. 시인은 ‘초상지풍(草上之風)’의 실상(實狀)에서 자기 자신과 민초들의 실상(實像)을 연상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김수영은 역사도 실존도 모두 그렇게, 오직 적나라한 삶의 구체(具體)로, 살다 갔습니다.      

사족 한 마디. 김수영의 시 「풀」은 풀의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시입니다. 그러면 시도 때도 없이 ‘눕는 것들’의 기분이 이해됩니다. 그 기분을 제대로 느끼는 자만이 통일시대의 ‘민주시민’일 것입니다. 한갓 풀인 주제에(조그만 힘만 가지면), 못된 바람이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초상지풍(草上之風)’의 ‘풍(風)’인 것처럼 노는 자들도 있습니다. 서민 출신으로서는 오갈 데 없는 자기기만입니다. 좁쌀로 태어난 자들이 언제부턴가 태산인 듯 행세합니다. 영락없는 ‘우주의 먼지’인 주제에, 그야말로 꼴불견입니다. ‘풀’은 지역이나 세대, 처지나 지위를 초월해서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연대감입니다. 그 모든 차별 위에 존재하는 것이 ‘풀’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눕는 것’인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풀’이라도 한갓 잡초거나 독초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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