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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1. 2019

칼을 논함

장자, 설검

● 오래 전에 써놓았던 「설검(說劍)」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그것에 조금 살을 붙인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세 가지 칼쓰기, 천자지검, 제후지검, 서인지검이 인간의 도량을 재는 유용한 비유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츄어 검도가인 저로서는 검도하는 동무들과 허심탄회하게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설검(說劍)     

장자는 궁전 문안에 들어서면서 잰걸음으로 걷는 예를 갖추지 않았다(왕 앞에서 신하된 자는 허리를 숙이고 잰 걸음을 한다). 왕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에도 일부러 절을 하지 않았다. 왕이 내색하지 않고 장자에게 물었다.

“선생은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내리실 작정인지요? 태자가 소개하는 분이니 무엇인가 큰 가르침이 준비되어 있으신 모양이구려.”

장자가 짐짓 목소리를 낮게 해서 말했다.

“저는 대왕께서 칼로 막신일호(莫神一好,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음) 하신다기에 칼과 그것을 쓰는 이치에 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장자의 말에 왕이 기뻐하며 물었다.

“선생은 능히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소?”

장자가 답했다.

“저의 칼은 십보일인에 천리불유행(十步一人 千里不留行)입니다.”

왕이 웃으며 반문했다.

“열 걸음에 한 명씩, 천리를 가도 적수가 없다는 말이신가? 그 말은 예부터 ‘협객행(俠客行)’을 노래하는 자들의 과장이 아니오? 노래 가사에나 나오는 말을 선생이 정색을 하고 말하니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소. 인간에게는 타고난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아무리 천하무적의 칼이라고 한들 그런 경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장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릇 칼의 이치는 후지이발에 선지이지(後之以發 先之以旨, 늦게 칼을 뽑아 먼저 상대의 몸에 내 칼이 닿음) 함에 있습니다. 태산 같은 기세로 상대를 압박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움직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한 이(利)를 찾는 데 온 정신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부라리면서 이쪽의 허점을 찾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동요되어 있고 칼은 굳어져 임기(臨機, 때에 맞게 움직임)의 부드러움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몸이 굳어진 상대가 공격의 기미를 보일 때 전광석화로 칼을 날려 필살의 일격을 가하면 상대는 이쪽을 당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십보일인’이라 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시간을 뜻한 것이니, 상대를 압박하여 후발선지(後發先至)로 상대를 격살하는 것은 다섯 걸음이면 충분하나 기세와 칼이 한 몸으로 다시 재응집되어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다시 그만큼 필요하기에 열 걸음이라 하였습니다.”

장자의 설명이 끝나자 왕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후발선지라,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구려. 나도 한 칼 한다고 자부하지만, 지금까지 격검의 묘(妙)를 그렇듯 간략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가히 선생은 절세의 선검자(善劍者)임이 분명하오. 다만 ‘태산 같은 기세’라 하였는데, 그 경지가 어떠한지 모르겠소.”

장자가 답했다.

“일기일경(一機一境), 무릇 모든 깨달음의 경지는 깨닫는 자 자신의 몫입니다. 스스로 한 문지방을 넘지 못하면 그 다음 경지를 알 수 없는 것이 사생(死生)을 거는 칼의 경지입니다. 저의 칼이 상대의 칼 아래 눕게 되면 그 칼은 주인을 잃고 한낱 무거운 쇠붙이에 불과하게 됩니다. ‘태산’은 가장 높을 때만 ‘태산’이니 그 경지를 말로 형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겉으로 나타나는 품새에 대해서만 말씀드리자면, 몸의 움직임은 금방이라도 금시조(금시조는 가루다라고도 하는데 불가의 상징이다. 몸은 사람의 몸이고 머리 모양은 매와 같다는 가상의 대조(大鳥)인데 날개짓 한번으로 바다를 가르고 그 속의 용을 잡아먹는다. )가 바다를 가르고 사악한 용을 낚아챌 것처럼 기세등등하고, 큰 코끼리가 강물을 성큼 건너듯 웅장하며(金翅劈海 香象渡河), 안정(眼精)은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아 상대의 발심(發心)이 그 안에 훤히 비추어지는 듯합니다.”

왕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주인에 따라 명검도 되고 부엌칼도 되는 것임은 선생이 양생(養生)의 도(道)를 설(說)하며 거명한 포정(庖丁, 『장자(莊子)』내편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우화 속의 주인공. 백정인 그가 소를 잡을 때에는 그 소리가 모두 음률에 맞았고, 은나라 탕왕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에도 조화되며, 요임금 때의 명곡인 경수(經首)에도 맞았다. 19년 동안 칼 한 자루로 수많은 소를 잡았으나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상한 곳이 전혀 없었다.)의 고사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며, 일기일경이 모든 공부(工夫)의 요체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오. 직접 선생의 경지를 내 눈으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오. 우선 숙소에 들어 쉬도록 하시오. 준비가 되면 연락을 하리다.”

“저도 실제로 시범을 보이고 싶습니다.”     


장자가 물러나자 왕이 검사들을 불러 선발전을 열었다. 이레 동안 쉬지 않고 시합을 시켰는데 그 와중에 사상자가 육십여 명이나 생겼다. 마지막까지 남은 자들이 대여섯 명이었는데, 왕은 그들을 불러 궁전 들 아래에 칼을 받들고 늘어서게 했다. 이윽고 장자를 불러내어 말했다.

“오늘은 검사들에게 칼의 이치에 대해 가르쳐주도록 하십시오.”

장자가 대답했다.

“제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바입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물었다.

“선생이 쓸 칼은 긴 것과 짧은 것 중 어느 것입니까? 누군가 선생의 쌍수도법(雙手刀法, 칼을 두 손으로 잡는 도법, 주로 장검을 쓸 때 사용함)이 볼 만하다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장검으로 하시겠소?”

“쌍수든 외수든 저는 다만 왕께서 원하시는 것을 보여드릴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하는 것은 칼의 장단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장자가 아뢰었다.

“나는 빨리 보고 싶소. 정히 금시벽해 향상도하의 경지가 어떠한지 보고 싶을 뿐이오.”

왕이 재촉했다.

“제가 먼저 세 가지 검에 대해 설명을 아뢴 다음 왕께서 바라시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왕이 허락하자, 장자가 말했다.

“칼은 다만 그 소용(所用)에 값할 뿐입니다. 그 소용에 따라 칼은 천자의 칼(天子之劍), 제후의 칼(諸侯之劍), 건달들의 칼(庶人之劍)로 나뉩니다. 그 중 어떤 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왕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장자의 뜻을 헤아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자의 칼이란 어떤 것인지 말씀해 보시오.”

장자가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천자의 칼이란 연나라의 연계(燕谿)와 색외산(塞外山)의 석성(石城)을 칼끝으로 삼고 제(齊)나라의 대산(垈山)을 칼날로 삼으며, 진(晉)과 위(衛)나라를 칼등으로 삼고 주(周)와 송(宋)나라를 칼자루의 테(劍環)로 삼으며 한(韓)과 위(魏)나라를 칼자루로 삼아 사방의 오랑캐로 씌우고, 사철(四季)로 감싸서 그것을 발해로 두르고 상산(常山)으로 띠를 둘러 오행(五行)으로 세상을 제정하고 형벌과 은덕을 논하며 음양의 작용으로 발동하고 봄과 여름의 화기(和氣)로 유지하며 가을과 겨울의 위엄으로 행동합니다. 이 칼을 곧장 세우면 앞에서 당해 낼 것이 없고 들어올리면 위에서 당해 낼 것이 없으며, 누르면 밑에서 당해 낼 것이 없고 휘두르면 사방에서 당해 낼 것이 없어, 위로 휘두르면 뜬구름을 끊고 아래로 휘두르면 지기(地紀,땅을 붙들어 맨 밧줄)를 잘라 버립니다. 이 칼을 한 번 쓰면 제후의 행동을 바로잡고 천하가 모두 복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자의 칼입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물었다.

“제후의 칼은 어떤 것인가요?”

장자가 큰소리로 답했다.

“제후의 칼이란 지혜와 용기가 있는 선비를 칼끝으로 삼고 청렴한 선비를 칼날로 삼으며 현명하고 선량한 선비를 칼등으로 삼고 충성스런 선비를 칼자루의 테로 삼으며 호쾌하여 걸출한 선비를 칼자루로 삼습니다. 이 칼을 뻗으면 그 앞에 당할 것이 없고, 들면 역시 위에서 당할 것이 없으며 누르면 역시 아래에 당할 것이 없고 휘두르면 역시 사방에 당할 것이 없습니다. 위로는 둥근 하늘을 본받아 해와 달과 별, 삼광(三光)을 따르고, 아래로는 네모진 땅을 본받아 네 계절에 순응하며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 서로 화합하게 하면 온 사방을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칼을 한번 쓰면 천둥소리가 진동하는 듯하여 온 나라 안에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 신하가 없습니다. 이러한 칼이 제후의 칼입니다.”

“건달들의 칼에 대해서도 말씀해 보시오”

왕이 말하자, 장자가 더욱 큰소리로 답했다.

“건달들의 칼은 머리칼은 봉두난발이요, 귀밑털이 바람에 나부끼고 머리에 납작하게 얹은 관에 끄나풀로 턱밑 살을 묶고, 소매가 짧은 옷을 입고, 눈알을 부라리며 험한 말을 내뱉으며, 임금의 어전에서 서로 목을 치며 아래로는 간이나 폐를 찔러댑니다. 이런 짓은 투계(鬪鷄)와 다름없는 것이니 건달들의 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사(劍士)가 칼싸움을 벌이다 일단 목숨을 잃게 되면 국사(國事)에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천자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건달들의 칼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황송한 일인 줄 알면서도 대왕께 무례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장자의 말을 듣던 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어나 단 아래로 걸어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장자의 손을 이끌어 어전으로 오르게 하였다. 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선생의 말씀이 옳소. 그러나, 저들을 그냥 두면 누군가가 저들을 부려 또 민폐를 끼칠 것이오. 저들이 들고 있는 칼은 반드시 피를 요구합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오. 칼은 선생의 말처럼 ‘금시벽해 향상도하’ 하는 기세와 품격을 지닐 때만 진정한 소용에 닿을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난세라 누구도 그러한 기품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소이다. 모두 좌면우고할 겨를이 없는 것 같소. 차라리 내가 혼자 뒤집어쓰더라도 저들의 칼이 피를 보고자 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소. 그러나, 이제 때도 된 듯하니 선생에 의지해 마감을 짓겠소.”

왕이 말을 마친 후 곧 수라를 지어 올리는 자가 수라상을 올렸다. 단 아래에서 검사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왕은 밥맛을 잃었다는 듯 세 번이나 그 주변을 맴돌 뿐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장자가 거들었다.

“대왕이시여 편히 앉으시어 마음을 안정하시기 바랍니다. 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다 아뢰었으니 더 괘념마소서.”

그러나 왕은 끝내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장자가 궁에서 물러난 뒤, 왕은 석 달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왕의 총애를 잃은 검사들은 노여워하며 서로 다투다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칼을 버리고 낙향하는 자들로 궁 앞의 대로가 한 달 여 동안이나 붐비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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