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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0. 2019

풋사랑

인간의 굴레에서

풋사랑     


덜 익은 풋과일들은 선뜻 삼킬 수가 없습니다. 내 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금방 밖으로 내뱉어집니다. 풋사랑도 마찬가집니다. 내 몸과 하나 되지 못하고 나를 떠나 영원히 밖으로만 떠돕니다. 그러나, 그 신맛이나 떫은맛은 평생 기억에 남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입안이 다 얼얼하도록 사람의 혼을 다 빼놓았던 일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의 열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같은 모양입니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보면 주인공 필립의 풋사랑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훤히 꿰고 있는지 참 신통합니다. 분명 작가의 경험이 십분 반영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종종 팔러먼트 스트리트에 있는 한 찻집에 차를 마시러 갔다. 던스퍼드가 그곳의 종업원 아가씨를 좋아했던 것이다. 필립은 그 아가씨에게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엉덩이도 작고 가슴은 남자처럼 납작했다.

「파리에서는 저런 여자,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네」 필립이 깔보듯이 말했다.

「얼굴이 기차지 않나」 던스퍼드가 말했다.

「얼굴이 왜 중요한가?」

하기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균형이 잘 잡혀 있었으며, 눈이 푸르고 이마는 널찍하면서도 낮았다. 빅토리아조(朝) 화가들, 레이턴 경, 앨머 태더마 등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 미인의 전형으로 내세우고 싶어 했던 그런 타입이기는 했다. 머리숱도 풍성해 보였고 손질을 아주 공들여 해서 앞머리를 이른바 앨릭잔드러 식으로 독특한 모양을 내어 내려뜨리고 있었다. 빈혈이 심한지 얄팍한 입술에 전혀 핏기가 없었고, 살결은 고왔으나 푸르스름한 기가 감돌 지경이었다. 볼에도 전혀 홍조가 없었다. 이빨은 가지런하고 아름다웠다. 일을 하는 중에도 손을 버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 두 손이 작고 가냘프고 희었다. 차를 나르면서도 따분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 『인간의 굴레에서』 중에서]     


필립은 던스퍼드가 좋아하는 찻집 아가씨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진술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거의 작가적(예술가적) 시선으로 그녀의 외모와 태도를, 나아가서 성격까지를, 상세하게 묘사해 냅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가 먼저 좋아한다고 한 여자였기에 그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독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친구가 그 여자의 호감을 얻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바람기가 있어서 한 여자를 두고(찻집 아가씨 같은 여자에게는 더더욱) 오래 기다리거나 공을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다림’이 효력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필립도 그런 때를 기다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멋진 고수머리에 얼굴은 생기발랄하고 미소가 멋진’ 던스퍼드는 ‘미스 로저스’의 ‘계산된 쌀쌀맞은 무관심’에 금방 마음을 접습니다. 발길을 돌려버립니다. 그러자 필립의 말도 바뀝니다.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쌩을 깝'니다. 미스 로저스와 밀고 당기는 사랑싸움을 대놓고 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시거나 너무 떫은 풋사랑입니다.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최고로 인정받고 여자를 혼자서만 소유하고 싶은 동물적 욕망에 자신의 전부를 떠맡겨버립니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가 자리에 앉자 그녀가 말했다.

필립은 별안간 가슴이 뛰면서 얼굴이 뻘개지는 것을 느꼈다. 

「볼일이 있어 빨리 오지 못했어요」

「해부하느라고요?」

「그 정도는 아니고」

「학생이지요?」 그녀는 <학생>을 <학섕>이라고 발음했다.

「맞아요」

그것으로 여자는 호기심이 다 충족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돌아서 가버렸다. 늦은 시간이라 담당 테이블에 딴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설책을 펼치더니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다. 아직 육 펜스짜리 염가판 소설책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문인들이 써내는 싸구려 주문소설들이 일정한 만큼 보급되고 있었다. 필립은 우쭐한 기분이었다. 드디어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 바야흐로 그의 차례가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기회만 잡히면 자기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 주리라. 경멸의 말을 마음껏 퍼부으면 마음이 풀릴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이런 계층의 여자들 가운데에도 이렇게 숨이 막힐 만큼 완벽한 윤곽선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싸늘했다. <중략> 필립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어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스케치한 뒤 나갈 때 그림을 테이블 위에 놓고 왔다. 그것이 뜻밖에 묘안이 되어버렸다. 이튿날 그가 들어가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림 그리시는 줄 몰랐어요」

「파리에서 이 년간 그림 공부를 했어요」

「어제 놓아두시고 간 그림을 주인아주머니에게 보여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더군요. 절 그리신 거예요?」

「그래요」 필립이 말했다. <중략>

「함께 오시던 그 젊은 친구분, 어디 가셨나요?」

「그 친구까지 기억하고, 놀라운데요」 필립이 말했다.

「잘생긴 사람이잖아요」

그 말을 듣고 필립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던스퍼드는 멋진 고수머리에 얼굴은 생기발랄하고 미소가 멋진 청년이다. 그가 가진 미모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중이랍니다」 필립은 후훗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필립은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까 주고받았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시 떠올려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를 아주 친근하게 대한다. 기회가 생기면 이번에는 더 잘 그려주겠다고 하자.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얼굴이 재미있고 옆모습도 아름답다. 핏기 없는 피부 빛에도 묘하게 매혹적인 데가 있다. 뭘 닮았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완두 스프가 떠올랐다. 천만에, 그렇다고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번에는 노란 장미 꽃잎, 활짝 피기 전에 떼어낸 노란 장미 이파리들을 떠올렸다. 어느 사이 그녀에 대한 나쁜 감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쁜 여자는 아냐」 그는 중얼거렸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 『인간의 굴레에서』 중에서]   

  

필립은 미스 로저스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급 호감으로 선회합니다. 그녀가 던스퍼드의 근황을 묻자 질투심도 느끼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인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자 그동안의 까칠했던 마음을 접고 그녀에 대한 ‘느낌’을 ‘사랑스러운 여자’로 바꾸어 간직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로소 여자의 마음을 얻는 득의(得意)의 방법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그의 예술이 자신의 불구를 만회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 그것이 던스퍼드의 외모와 교환 가능한 것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서 그녀의 선택이 ‘손해’나 ‘수치’가 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하나의 징표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미스 로저스는 다른 여자의 그림은 절대 그려주지 말라는 당부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말로 필립은 자신과 자신의 예술이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녀와의 데이트를 차근차근 진행시킬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미스 로저스가 아주 현실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필립에게 자신이 다른 남성과 데이트 하는 것을 용인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의 보조 의사로서의 주급을 묻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와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버립니다. 필립은 이제 사랑의 노예가 됩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더 처절하게 벌어집니다. 그의 내면은 온통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절규뿐입니다.   

  

...전부터 해 오던 이 공상이 떠오르자 밀드레드 로저스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괴상하고 예쁘지도 않았다. 말라빠진 것도 싫었다. 그날 저녁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야회복 차림으로 보니 가슴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병약해 보이는 안색도 어쩐지 불쾌감을 주었다. 품위 없는 여자였다. 어휘는 투박하고 빈곤할 뿐 아니라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는데 그것은 정신이 텅 비었음을 말해 준다. 뮤지컬 코미디를 보다 웃기는 대사가 나올 때마다 터뜨리던 그 천박한 웃음소리도 떠올랐다. 그리고 술잔을 입에 가져갈 때 의식적으로 새끼손가락을 뻗던 것. 말하는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품위를 세우려고 하지만 오히려 거슬리기만 한다. 건방진 태도는 또 어떤가. 따귀를 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갑자기, 때린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아니면 작고 귀여운 귀의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그는 느닷없이 솟구치는 감정의 회오리에 빠지고 말았다. 못 견디게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를, 그 가냘프고 연약한 몸뚱이를 껴안고 그 파리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파르스름한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 『인간의 굴레에서』 중에서]     


필립은 사랑이란, ‘사람의 넋을 빼앗아 온 세상을 봄처럼 느끼게 해주는 어떤 황홀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오직 어머니만 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아니면, 황순원 소설 「별」에 나오는 두 살 터울의 동복(同腹) 누이나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도 아니면 「소나기」의 ‘윤초시네 증손녀’처럼 일찍 죽는 순애보에서나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천애 고아입니다. 거기다가 예술과 의학을 두루 공부한 수재형 인물입니다. 그에게 낮은 신분 출신으로 찻집에서 차를 나르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밀드레드 로저스 같은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머리 안이 가벼운 그녀에게는 허우대 멀쩡하고 허풍을 떠는, 돈푼께나 버는 통속적인 남자가 어울립니다. 밀드레드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립을 결혼 상대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필립만 모릅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정수(精髓)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맹목적으로 자신의 감정만 추수하다가는 세상 어느 여자와도 알콩달콩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그러다가는 영영,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그 자신은 모릅니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 보면 저 자신의 젊은 날의 자화상과 시종일관 마주치게 됩니다. 조실부모 경험, 교회생활 경험, 가난이 준 열등 콤플렉스, 진로 변경과 예술 체험, 상처뿐인 풋사랑 등등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정황에 대해서 그는 적확한 표현으로 묘사해 냅니다. 담담하게(냉정한 톤으로) 있는 그대로를 묘사해 나갑니다. 1권의 후반부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밀드레드 로저스와의 풋사랑을 읽으며 저는 내내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대화의 태반을 저도 말하고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소싯적 제 18번이었던 것이 그냥 허투루 생긴 일이 아니었음을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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