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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3. 2019

아직도 비밀이

인정투쟁

아직도 비밀이     


TV에서, 풀기 어려운 난제를 풀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수학자들의 치열한 삶을 보여줍니다. 몇 백년간 못 풀던 증명 문제 중 현상금 백만불까지 붙은 것도 있었다네요. 7년 칩거 끝에 한 수학자가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세계가 모두 그에게 박수를 보냈지요. 그 다음이 더 볼 만합니다. 그 수학자가 상금 100만불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생계에 전혀 신경 쓸 일이 없는 타고난 백만장자여서가 아니었습니다. 명예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유명 대학의 저명 교수여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평범하고 가난한 무직의 수학자였을 뿐이었습니다(지금도 두문불출이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주의 비밀을 쫓는 내가 고작 상금 100만 달러를 쫓을 수야 있겠는가?”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습니다. 대단한 자부심입니다. 저런 미친 자부심이 있으니까 그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한때 한 자부심 하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해냈습니다. 젊어서 막 소설가가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돈이나 명예가 다 눈 아래 있었습니다. 제가 엿본 ‘생의 비밀’을 부박한 인생들과는 함부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상태가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늘 한결같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냉온탕을 주기적으로 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비밀’과 함께 할 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문득 문득 찾아오는 ‘현실’은 그런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뜨리곤 했습니다. 자정이 넘어 모든 마법이 철수한 다음에 밀려오는 그 낯선 공허감은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습니다. 

나이 든 지금은 젊어서 그렇게 매달렸던 ‘비밀’들도 이미 다 사라진 상태입니다. 마음에 새겨둔 좌우명도 있을 리 없습니다. 있다면 그때그때 잘 살자, 정도일 것입니다. 한 때는 ‘입화자소(入火自燒)’, ‘막신일호(莫神一好)’ 같은 말들이 심금을 울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도 제 곁에 없습니다. 하루하루 ‘소외’를 넘어서는 일에 급급합니다.     

오늘의 주제로 들어가겠습니다. 글께나 아는 자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언필칭, 자기 인정에 실패하는 것 즉, 존재 증명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닐까요? 소외에 대해서는 존재론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우리 같은 먹물들에게는 ‘불인정’과 이음동의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외’는 자의식을 포함한 타자(他者)로부터의 ‘불인정’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저의 생각과 같은 설명이 있어서 인용합니다.   

  

...공(孔)선생은 하고 많은 주제 중에서 하필이면 왜 1장에서 인정(認定)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까?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 ‘인정 욕구(need for recognition)’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타자로부터 나의 가치를 공인받으려고 단순히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까지 불사한다. 내가 타인에게 모욕을 당하면, 즉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다양한 위기를 겪는다. 작게는 기분이 나쁘거나 감정이 상하는 정도이다. 심하게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허무감을 느끼기도 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무력감마저 느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모멸을 준 타자에게 시정을 요구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자살함으로써 가해(자)의 부당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공선생은 불인정에 대해 반작용을 하지 않고 못 들은 척 흘려버린다(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성내지 않으니 이 도한 군자가 아닌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달팽이처럼 자기 세계로 들어갔다 빠져나와 다시 세계를 넓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동지가 찾아오는 것이다(有朋自遠方來). 그이와 만나면 동지가 두 사람이 되고 또 오면 세 사람이 된다. 이런 식으로 불어나 무리를 이루면 그것은 세상의 냉소를 버티는 바람막이이면서 세상을 바꾸는 진지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그곳이 성역이 되고 해방 공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곳에 처량함과 쓸쓸함이 어디 있겠는가? [신정근,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중에서]    


헤겔 철학의 한 중요한 화두이기도 했던 인정(認定, Anerkennung) 투쟁의 문제는 한 인간의 생사를 가를 수 있을 만큼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글께나 아는 자들에게 특히 그 문제가 더 가혹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불인정이란 곧 자신의 존재 부정, 존재 소멸을 뜻합니다. 자신의 신념과 학설과 탐구가 무시당하는 일은 곧 자신의 존재성 자체가 무효, 박탈당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 이상의 ‘소외’가 없습니다. 조선 시대의 사색당파, 그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배후에는, 눈에 보이는 정치적 이해타산과는 별도로, 글께나 아는 자들의 인정 투쟁이라는 암묵적인 경쟁의식, 생사를 건 모의쟁투가 존재했습니다. 왕가의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에 임해 상복을 입는 ‘복례(옷입는 룰)’ 하나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오고가고 그 결과에 따라 삭탈관직과 사사(賜死)가 자행되었던 배경에는 그런 그들만의 ‘인정 투쟁’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말한,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화내지 않는 자가 군자라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말의 의미가 요즘처럼 폐부 깊숙이 와 닿는 때가 없습니다. ‘소외’가 얼마나 무서운 핍박이라는 것을 나이 들면서도 여전히 실감합니다. 돌이켜 보면, 제 인생도 인정 투쟁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자세한 사정은 약하겠습니다). 욕심도 많았고, 시샘도 많았고, 성취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습니다. 필요한 집중과 선택도 거르지 않고 해 왔습니다. 결국은, 수준은 낮지만, 하고 싶었던 것은 거의 모두 해본 셈이기에 여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다. 젊을 때 잠시 엿본 그 ‘비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비밀’이 무엇인지 한 번은 더 알아보고 가고 싶습니다.     

‘비밀’ 이야기, 인정투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한 ‘오래 지속되는 인간’의 인정투쟁에 대한 생각입니다. 세상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을 지키는 방법도 다릅니다. 삶의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공자나 노장(老莊)의 논법이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됩니다. 그들 성인들의 말들이 진리로 존숭받을 수도 있습니다.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예나제나 인간세의 영원한 진립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붙들고 사는 자들은 반드시 그 율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넘어서 삶의 테두리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삶을 살게 된 자에게는 그런 그들의 말들은 논두렁의 개구리 울음소리마냥 그저 징징거리는 소리일 뿐입니다. 논두렁의 소란은 이미 그들 ‘오래 지속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 ‘인간을 뛰어넘는 인간’들은 한 개인의 생의 주기를 초월해 모든 사건들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고작 무엇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그들의 인정 투쟁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원인은 우리가 사는 속세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그 모든 설교와 설법으로, 한 사람의 ‘오래 지속되는 인간’에 대한 함부로 된 분석과 해석을 자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건 ‘비밀’에 대한 예우가 아닙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기일을 맞아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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