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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30. 2019

사자(獅子)의 눈높이

독자를 사랑하는 글

사자(獅子)의 눈높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글쓰기의 제1의 요목입니다. 자기가 쓰는 글을 읽을 사람의 독서 목적, 취향, 교양 수준을 생각하지 않는 필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독자의 ‘불신의 장벽’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사다리가 하나씩은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어떤 식으로든 '독자'는 '작가'를 길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모 구청 소식지에 수필을 한 편씩 실을 때였습니다. 매번 편집자(편집 대행사 직원입니다)에게서 한 소리씩 들었습니다. 원고가 너무 어렵다는 거였습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지나치게 전문적인 것이어서) 다른 글로 바꾸어줄 수 없느냐는 요청을 자주 받았습니다. 몇 번 원고를 고쳐서 보내다가 나중에는 "원고를 바꿀 게 아니라 필자를 바꾸어야 될 것 같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만두었습니다. 구청 주민이 몇 십 만 명까지 되는 터라 소식지를 읽는 분들의 독서 수준을 일괄적으로 낮게 가져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편집(대행)자 쪽에서는 ‘낮은 물’ 소리는 자주 듣겠지만 ‘높은 물’ 쪽에서는 아예 무시하고 만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 아파트에도 (다른) 구청 소식지가 매달 배달됩니다(직전 구청장도 함께 살았습니다). 몇 번 가져다 보았지만 그야말로 영양가 없는 ‘소식’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져오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비싼 종이로 만들어진 구청 소식지는 볼 때마다 늘 그 자리에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겪어본 일에 비추어 보면, 차 떼고 포 떼고, 결국 ‘독자의 눈높이’를 지나치게 낮게 책정해서 ‘내용 없는 소식지’로 전락한 것이 그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두 사람의 주민이 “구청 소식지에 왜 이리 어려운 글이 실려 있느냐”라고 민원을 제기한다고 해서(이 내용은 제가 모 구청 소식지 편집자에게 들은 내용입니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낮은 수준’만을 존중한 결과가 결국 그런 폐지(廢紙) 신세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수십 만 명 중에서 단 천 명이라도, “아, 이런 좋은 글이 구청 소식지에도 실리는구나!”라는 평가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소식지는 제 구실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 만 명이 읽어도 누구 한 사람 그 소식지에 실린 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 소식지는 죽은 소식지입니다. 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앙지든 지방지든 독자의 수준을 지나치게 낮게 잡은 신문은 반드시 죽습니다.     

글자를 찾아서 ‘읽는 자’들은 언제나 높이 오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글을 원합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것은 그나마 그런 욕구에 부응하는 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예 '내가 읽을 글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불평도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저 외면할 뿐입니다. 무가지(無價紙)라고 해서, 일개 구청 소식지라고 해서, ‘누구라도 읽고 공감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3박자 갖춘 글’로만 지면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출판 일을 하는 출판사 사장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게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쉽고 유익한’ 글이 가장 좋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다소 읽기 부담스럽지만 유익한’ 글의 존재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쉬운 글 위주로 가되, 수준 낮은 독자(죄송합니다)들에게 문식적 차원에서의 저항감, 혹은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글도 공공의 소식지에는 꼭 실어야 합니다. 매 회 한두 편은 그런 글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식지가 삽니다. 그래야 저희 같은 먹물들도 소식지를 보고 구정(區政)에 관심을 가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대학 교수에게 ‘문화’에 관한 원고를 청탁해 놓고선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고급문화에 대한 정보도 없고, 구성상의 일말의 아이러니도 없고, (일상에 대한) 독자의 반성도 촉구하지 않는, 그런 무늬만 요란한 ‘도배지’ 같은 글을 써달라고 한다면 참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필자 선정’이 애초에 잘못된 것 아닐까요? 아니면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한 도전이나 모독이 아닐까요? 지식인의 사명을 생각하며(착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목이 아프도록, 부랴부랴 글을 써서 보낸 선의(善意)를 너무 무시하는 일이 아닐까요? “내가 그렇게 싸게 보였나요?”, 그런 속 좁은 생각이 막 드는 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좀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끝 있게 이런 글을 또 쓰는 것을 보니 아직도 그 화가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 평소 존경하는 페이스북 친구 분께서 제 글을 공유하시며 한 말씀 하셨습니다. “좋은 글이다. 다만, 세 번은 읽어야 필자의 마음 1/3 정도가 이해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척 고마우신 말씀이지만 한 편으로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읽기 능력이 부족하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늘 학생들에게 유명한 외국학자가 말한 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텍스트는 항상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한다.”라고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그 말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저는 ‘텍스트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너그럽지 못했습니다. 텍스트가 자유롭게 입을 열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텍스트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도록 이중삼중으로 자물쇠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친절하고 겸손한 글쓰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독자 스스로 글 속에서 ‘나의 생각할 거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글이 좋은 글입니다. 자기 생각만을 강요하거나 독자가 읽기 어려운 단어나 문맥이 남발되어 있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닙니다. 깊이 있고 독창적인 식견, 독자의 눈높이에 대한 배려, 매혹적인 필력(筆力), 그 세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는 필자가 되는 것이, 프로든 아마추어든, 대중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를 하는 이들의 공통된 소망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 3박자를 갖추어야 제대로 된 작가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대로 된 작가’가 아닙니다. 구청 소식지 편집자와의 불화가 그것을 표본적으로 보여줍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존경하는 페북 친구 분의 ‘세 번 읽고 1/3 이해한다’라는 말씀은 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과분한, 일생일대의, 과찬이었습니다만 동시에 냉정한 채찍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수준 높은 독자의 평가’를 한 번 받아보는 것이 평소의 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호 통재라), 일언이폐지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어쨌든 저의 글쓰기는 교만한 자의 글쓰기였습니다. 자랑하고, 가르치고, 병 주고 약 주는, 무례한 글쓰기였습니다. ‘세 번 읽고 1/3 이해한다’라니,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가로 세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저의 욕심을 꿰뚫고 계신지, 마치 먹잇감을 앞두고 있는 사자(獅子)의 두 눈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자의 눈높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가히 두려울 뿐입니다. 통절히 반성하고 앞으로 글을 쓸 때는 항상 그 ‘사자의 눈’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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