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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30. 2019

황순원 소설과 에로티즘 3

위대한 어머니와 아들 연인

황순원 소설과 에로티즘 3   

  

황순원 소설의 에로티즘 미학이 연출하는 세 번째 장면이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인데, 상대가 누가 되었든, 나르시시스트 주인공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레이트 마더와의 힘겨운 싸움을 거쳐서 반드시 그녀를 누르고(척살하고) ‘승리’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부정적 모상(母像)으로 무의식의 근원이 되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는 죽지 않고는 자신의 ‘아들 연인(Son-Lover)’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황순원 소설 『움직이는 성』의 ‘준태’는 그런 비정한 ‘무의식적 근친상간’의 에로티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비정한 ‘승리’ 없이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보여줍니다. ‘창애’와 헤어지고 ‘지연’에게서마저 도피한 ‘준태’는 옥구군의 한 개간지 초막에 그의 마지막 거처를 마련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그가 자학의 공간으로 선택한 곳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의 무의식이 유폐되어 있는 ‘모태적 공간’에 다름 아닌 곳입니다. 그를 찾아간 ‘지연’에게 그의 ‘모태적 공간’은 충격적인 장면을 선사합니다.     


「여기가 함선생님 계신 곳이죠?」

좀 전부터 빨래손을 멈추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지연의 물음에는 대답 않고, 「서울서 오셨구만이라우?」 한다.

「네… 지금 안 계신가요?」

여인이 그냥 빤히 지연을 치어다보기만 한다. 꽤 큰 체구인데, 핏기 없고 수척한 얼굴에서 쾡하니 큰 눈이 초점 잃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

「안 계신가요?」지연이 재차 물었다.

「우리 돌이아빠 집에 없어라우.」 옆의 사내애를 턱으로 가리키며 여인이 말했다. (『움직이는 城』, 9-433)     

『움직이는 성』에서 가장 신화적인 인물이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여인=돌이엄마’입니다. 그녀는 ‘신(神)이 실린’ 채 ‘준태’를 찾아와 ‘돌이아빠’가 되기를 강요합니다(그녀의 등장에 대한 텍스트 내적 사전 설명은 없습니다). 그녀의 육욕과 풍만한 육신이 ‘준태’의 밤을 거침없이 침범하는 대목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그녀(혹은 그녀의 행태와 그런 그녀를 떠나지 못하는 ‘준태’의 행태)가 바로 ‘준태’를 놓아주지 않는 무의식 속의 그레이트 마더라는 것을 암시해 마지 않습니다. 작가는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의 본향이 어딘지를 보다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를 등장시킵니다. ‘준태’가 ‘지연’이 이해할 수 없는 온갖 핑계를 대고 그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나르시스트 에로티즘에 대한 황순원 소설의 본격적인 탐구는 「내일」이라는 중편에서 이루어집니다. ‘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공 남녀 모두가 나르시시스트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화자 주인공 ‘나’가 자신이 대학교수 시절에 쓴 영문학 노트를 읽은 적이 있다는 한 ‘젊은 여자’가 혼자 술에 취해 앉아 있는 자기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고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 ‘보고’와 함께 본격적인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 스토리텔링이 펼쳐집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녀가 부적 권위(자신의 전공에 절대적인 지향을 보여준 ‘영문학 노트’)와 외로운 모습(혼자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같이 보여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라고 미리 전제하면서 두 나르시시스트가 온갖 변태적 행위(?)들을 자연스럽게 열거합니다. 다음의 대목은 그 일부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젊은 여자는,

「이상한 여자죠? 상대방은 아주 착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했다.

「이상할 것두 없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야.」

이 젊은 여자도 인생의 어떤 면에서 권태와 무관심을 맛본 것이다. 이러한 젊은 여자라면 서로 만나도 피차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도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그저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첫째 상대방의 생활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말 것, 그리고 어느 편에서든지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을 때는 그 한 번만으로 서로가 다시는 만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 된다는 것. 이 의향에 젊은 여자도 찬의를 표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더 첨가했다. 약속한 시간에서 반 시간 이상은 기다리지 말자는 것이다. 좋다고 했다. (「내일」, 4-286)     

이상한 여자와 이상한 남자일 수도 있는 ‘젊은 여자’와 ‘나’는 ‘이상할 것두 없지’ 라며 자신들을 합리화하며 본격적인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 행각에 나섭니다. 자신들이 서로에게 성 상대자라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생리적, 문화적, 윤리적 요소들을 조심스럽게 점검하고 그런 ‘점검’을 토대로 그 욕망을 제어하는 데서 성감(性感)을 추구하는 역설적인 사랑을 합니다. 서로의 나이 차를 점검하고(‘나’의 흰머리와 관련된 일화), 서로가 지닌 연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점검하고(인생의 대합실이라는 비유적 언어와 관련된 대화), 서로의 삶이 조화될 수 있는지 점검합니다(대작 모티프). 그러한 점검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나’는 ‘젊은 여자’의 입술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습니다. ‘나’는 자신의 성적 욕망이 억압되는 갈등상황을 ‘순수한 감정’의 옹호라고 합리화합니다(「내일」, 4-311). 그러면서 자기애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젊은 여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다 드러내는 사랑,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대상애에 마지막 지점까지에는 도전하지 못합니다(「내일」, 4-343).


「내일」이 보여주는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은 무의식 속의 모성 콤플렉스가 현실 속에서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 ‘불완전한 사랑’을 만들어 내는지를 상세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소년기 에로티즘이 보여줄 수 있는 한 속성이기도 하고, 미숙한 성인들이 곧잘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내일」의 주인공들은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복되지만, 황순원 소설이 그러한 다양한 사랑의 모습 즉, 실패와 혼란과 결핍의 사랑들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에로티즘 미학의 영토성 확장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것이 주체가 행하는 텍스트무의식 차원의 의식화 작업이라는 의미를 띤다는 점을 더욱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심리주의 문학으로서의 황순원 소설이 차지하는 문예사적 위치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개별 작품을 이해하는 보다 심층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는 한 기회도, 그러한 관점은,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황순원 소설의 본령이 ‘에로티즘’이라는 전제 하에, 텍스트무의식 상의 주체의 자기실현이 그러한 에로티즘 미학을 어떻게 구현해내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주제적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황순원 소설의 문제는 여전히 많습니다. ‘에로티즘 미학’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성콤플렉스’ 하나만 가지고 한 작가의 ‘미학’을 일도양단, 가타부타 논하는 것은 결국 견강부회, 아전인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런 ‘유보와 양해’의 관점에서 제 이야기를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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