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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9. 2019

황순원 소설과 에로티즘 2

그레이트마더

황순원 소설과 에로티즘 2     

황순원 소설이 이니시에이션 서사의 완벽한 자태를 갖추고 본격적인 소년기 에로티즘 묘사에 나선 작품이 「소나기」입니다. 그 소설에서 황순원은, 정공법으로, 모든 에로티즘은 육체의 그것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한 역설적 방법으로(부족한 것이 최고의 만족이라는) 소년기 에로티즘을 들어 에로티즘의 한 꼭지점(최고 수준)을 묘사해 냅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잡는 것이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소나기」, 3-13)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상채기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홱 일어나 저쪽으로 달려간다.(3-18)

…비에 젖은 소년의 몸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3-20)

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그러안았다.(3-20)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같은 게 들어있었다. 소녀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이게 무슨 물 같니?」

소년은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냈다. 그날 도랑 건늘 때 내가 업힌 일 있지? 그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3-21,22)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입술을 가져다대고 빨기 시작했다’, ‘목을 그러안았다’와 같은 술부는 그것의 목적이나 대상을 떠나, ‘소녀’와 ‘소년’이 나누는 에로티즘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에서 황순원 소설이 묘사의 힘으로 관념을 압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년기 에로티즘이 성인의 그것에 못 미친다는 관념은 그런 ‘묘사의 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육체를 넌지시 바라다보는 포즈’를 취함으로써 타나토스의 침범을 받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경지를 드러냅니다. 에로티즘의 끝은 항상 죽음입니다. 육체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소나기」의 환상은 그 끝을 영구히 봉인합니다. 현실을 그런 방식으로 완전히 압도합니다. 불패의 환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순원 소설에서 묘사하는 소년기 에로티즘은 ‘신성의 에로티즘’을 지향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절대성을 가능케 하는 자양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황순원 소설의 텍스트무의식이 그의 젖줄을 대고 있는 곳, 즉 모성성를 향한 집착과 염원, 혹은 아니마 갈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텍스트 분석이 가져다 준 결론입니다. 


「왕모래」는 그런 의미에서 황순원 소설 이해의 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타락한 어머니를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아들의 이야기인 「왕모래」 역시 탁월한 묘사의 힘으로 ‘모성 살해’의 동기와 진정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성(魔性)의 모성을 제거함으로써 모성성의 영토성을 정화하겠다는 무의식의 의지로 읽힙니다. 

‘모성 살해’라는 극단적인 서사로까지 발전하는 모성성에의 집착, 아니마 갈등이 에로티즘 미학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초기 황순원 소설에 나타난 텍스트무의식 분석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특별한 시기의 특별한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것이 바로 초기 황순원 소설의 한 특징이기도 한 것이라는 점이 지금까지의 행한 논의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성콤플렉스, 혹은 아니마 갈등은, 소년기 에로티즘과 같은 ‘특별한 시기’에 대한 관심뿐만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도 집착하게 합니다. 앞서 살펴본 「늪」에서도 일부 언급되었지만, 황순원 소설은 삼각관계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황순원 소설은, 장편일 경우, 예외 없이 삼각관계의 에로티즘을 추구합니다. 『카인의 후예』(오작녀와 박훈/오작녀의 남편)와 『나무들 비탈에 서다』(장숙과 동호/현태)에서는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갈등이, 그리고 『나무들 비탈에 서다』(동호와 장숙/옥주), 『일월』(인철과 다혜/나미), 『움직이는 성』(준태와 지연/창애), 『신들의 주사위』(한수와 진희/세미)등에서는 한 남자를 둘러싼 상극적인 두 여자의 갈등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황순원 소설이 삼각관계의 에로티즘을 추구할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경향은 ‘상극적인 대립관계’입니다. 인물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에 의해 선명하게 나누어집니다.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의 대상을 두고 서로 경합하는 인물들은 어느 한 쪽이 선(善)이면 다른 한 쪽은 반드시 악(惡)으로 묘사됩니다. 남자 인물 중에는 ‘박훈’과 오작녀의 남편이 가장 그렇고, 여자 인물 중에는 ‘다혜’와 ‘나미’가 대표적입니다. 본디 삼각관계 에로티즘이 그레이트 마더의 아들 연인(son-lover)이 즐겨 택하는 애정의 구도이며, 그레이트 마더가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이 각각의 상대에게 분리되어 투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황순원 소설의 그러한 특징은 이른바 아들 연인의 아니마 갈등을 보다 현실적인 층위에서(의식의 국면에서),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레이트 마더의 구속을 받는 주체(자아)는 자신의 여성적 영혼(아니마)을 분열시켜 이원화합니다. 선과 악으로 이원화된 아니마 표상은 동정의 대상이며 동시에 증오의 대상입니다. 그것들과 갈등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파멸하는 주인공은 「늪」에서처럼 우로보로스적 상황에 놓여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의 구체성을 통과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레이트 마더의 흡인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나갑니다. 텍스트무의식이 추구하는 자기실현은 그러한 ‘의식화의 과정’을 서사의 맥락 속에서 정위(定位)시키는 의지에서 발견됩니다. 갈등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파멸하는 서사 그 자체가 바로 그레이트 마더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는 주체의 등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순원 소설의 에로티즘 미학이 삼각관계의 에로티즘을 통해 주체의 내면에 고착된 모성성을 탐구하는 양상은 장편소설이라는 장르적 속성과 접속되면서 사회 역사적 맥락과도 활발한 교섭(交涉)을 이루어냅니다. 단편이 보여주지 못한 총체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이지만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합니다(황순원은 기본적으로 초역사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카인의 후예』 이후, 사회 역사적 층위의 인간의 삶은 극히 일부분(종교적, 문화적 방면)에 한해서만 황순원 소설의 관심사가 된다. 황순원이 『움직이는 성』과 『신들의 주사위』에 이르러 비로소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대가(大家)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는 세간의 평은 그의 그런 입장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 ‘동호’는 ‘숙’과 ‘옥주’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동호’에게 ‘숙’은 정신적 삶을 표상하는 존재이고 ‘옥주’는 육체적 삶을 표상하는 존재입니다. ‘동호’는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의 전체성으로 통합하는 데 실패합니다. 자신의 성숙을 매개로 상대에게 맞는 사랑의 태도와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는 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숙’에게 육체를 요구하다 실패한 것처럼 ‘옥주’에게 정신을 요구하다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그의 실패와 좌절은, 자신을 던져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무의식에 내재한 아니마 갈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로 전락한 아들 연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책임이 될 판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삼각관계의 에로티즘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를 중심축으로 성립된다. 그레이트 마더의 아들 연인이 자신의 내면의 고착(모성콤플렉스)을 의식화하는 데 실패하면 나르시시스트로 전락한다. 황순원 소설이 그들에 관심하는 것은 텍스트무의식 차원에서 행하는 의식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결정은 항상 그레이트 마더의 몫이며 자신은 그 계시가 있기까지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 갈등하는 존재로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호’의 나르시시스트적 행태는 『일월』의 ‘인철’에게도 그대로 답습됩니다. 인철은 백정의 후예라는 굴레를 지고 삽니다. 그러나, 인철을 구속하는 것은 그러한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모성 콤플렉스라는 내부적 조건입니다. ‘동호’에 비할 때 그는 사회 역사적 조건이 부여하는 속박에서 훨씬 자유롭습니다. 그는 그 앞에 등장했던 황순원 소설의 어떤 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앞으로 등장할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속성들 거의 모두를 이미 함유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 무책임성, 과단성의 상실, 연애지상주의, 수동적 여성관 등 황순원 소설의 나르시시스트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인물이 ‘인철’입니다. 

‘인철’의 여자는 ‘다혜’와 ‘나미’입니다. 전자는 조화, 평정, 지속, 정신 등의 관념으로 요약되는 성격이고, 후자는 부조화, 열정, 변화, 육체 등으로 요약되는 인물입니다. 즉 선한 모상(母像)과 악한 모상의 대립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러한 양상으로 성립된 피투사체들은 당연히 삼각관계를 유발합니다. ‘인철’은 그러한 삼각관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전혀 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그것이 쾌감으로 다가옵니다. ‘다혜’와 만나면 어머니 같은 푸근함이 있고, ‘나미’와 만나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인철’에게는 이 두 사람을 가늠하는 어떠한 의지적 실천도 가동(실행)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일월』은 소설이 출발할 당시 추구했던 바, 사회 역사적 조건과 실존적 조건 사이의 함수관계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삼각관계의 에로티즘이 본말전도,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움직이는 성』은 그런 의미에서, 『일월』의 한계를 넘어선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사회 역사적 조건과 결부될 수 있는 개인의 삶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비교적 자유롭게 애정 실현의 문제가 중심 소재로 다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성호’, ‘민구’, ‘준태’라는 세 남성 주인공과 ‘홍여사’, ‘명숙’, ‘은희’, ‘박수무당 변씨’, ‘지연’, ‘창애’라는 여성 주인공 사이의 다양한 애정 실현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본격적인 애정소설이라 할 만한 것입니다. 

등장인물 가운데 황순원 소설 특유의 아니마 갈등에 기인하는 삼각관계 에로티즘을 구현하는 인물은 ‘성호’와 ‘준태’입니다. 그 중에서도 ‘준태’가 더 문제적인데 그는 삼각관계 에로티즘과 나르시스트 에로티즘의 경계에 서서 양쪽 경지에 모두 발을 담그고 있는 인물입니다(나르시스트 에로티즘은 삼각관계의 한 축이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레이트 마더 자체라는 점에서 삼각관계 에로티즘의 한 특별한 경우라고도 볼 수 있다). ‘준태’는 제자였던 아내 ‘창애’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기로 합의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반성은 물론이고 아내에게도 아무런 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창애’는 그의 그러한 무관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에두 말했지만 선생님은 사랑을 받을 줄만 알구… 아녜요, 사랑을 받을 줄두 모르구, 사랑을 할 줄두 모르는 분예요.」 창애는 가볍게 웃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어서 이런 웃음을 웃을 수까지 있는 것이다. 준태도 따라 웃으며,

「그렇게 생겨먹은가부지 아마.」

「그저 자기자신만을 사랑하구 있는 것 아녜요?」

「그럴까?」 준태는 창애의 말을 잠시 되씹다가, 「나 자신두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야 난. 거기 비하면 창앤 너무 사랑을 많이 하는 편이지.」(『움직이는 城』, 9-240)     


‘준태’가 자기애에 빠져있다는 ‘창애’의 지적은 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지만, ‘준태’는 그것마저 부정합니다. 일종의 자기기만입니다. 그는 이미 ‘지연’과의 사랑을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준태’는 자기 말대로 사랑의 금치산자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애에 한정된 것이며, 아니마에 대한 애착도 포함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마저 불가능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자학적인 제스츄어는 자기애의 도착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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