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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8. 2019

황순원 소설과 에로티즘

 별, 늪

황순원 소설과 에로티즘     


황순원 소설은 그 본령을 에로티즘에 두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항상 사랑을 다룹니다. 그는 여러 방향에서 그것을 탐구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탐구의 양상은 당연히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그것도(소설쓰기)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작가 황순원이 주로 다루는 사랑의 양태는 소년기 에로티즘, 삼각관계 에로티즘, 나르시시스트 에로티즘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에로티즘 미학의 근저(根底)에는 창작심리학 층위의 아니마 갈등(모성 콤플렉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성애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을 다양한 에로티즘 미학으로 창작과정에 반영함으로써(의식화함으로써) 그 부정적 에너지를 상징화 혹은 승화를 통해 소산(燒散)한다는 자기실현의 텍스트무의식이 관찰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른 작가들이 자신의 내면에 고착된 모성성을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두고 그것에 동화되거나 이화(異化)되어야 할 것으로 묘사해 나가는 양상을 보인다면, 황순원은 그러한 수준은 물론,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모성콤플렉스를 소설미학의 근본 동인(動因)으로 삼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황순원 소설이 내면에 고착된 모성성과 관련하여 소년기 에로티즘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주로 그의 초기작에서입니다. 「별」,「늪」(「늪」의 주인공 ‘태섭’은 청년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에로티즘의 양상은 소년기 에로티즘에 속한다), 「소나기」,「왕모래」 등에서 다채롭게 소년기 에로티즘이 조명됩니다.     

,,,그러나 이때 소녀는 또 자기만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느껴지는 어떤 부족감을 못 참겠다는 듯한 기색을 떠올렸는가 하면,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기면서 어느새 자기의 입술을 아이의 입에다 갖다 대고 비비었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피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서로 입술을 비비고 난 뒤에야 소녀에게서 물러났다.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는, 거친 숨을 쉬면서 상기돼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소녀는 아이에게 결코 아름다운 소녀는 아니었다. 얼마나 추잡스러운 눈인가. 이 소녀도 어머니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별」, 1-222) [황순원 소설에 대한 인용은 『황순원 전집』(문학과 지성사,1990)에서 취한다. 1권 222쪽을 <1-222>로 표기한다.]    

 

「별」의 주인공은 모성애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을 ‘어떤 부족감을 느끼게 하는 연애’(육체적 에로티즘이 거세된 심정적 에로티즘)로 대리보상 받으려 합니다. 육체적 접촉은 모성성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을 ‘소녀’는 견디지 못합니다. ‘아이’가 추구하는 에로티즘이 육체의 그것이 아니라 아니마 갈등의 결과로 선택된 ‘심정(心情)의 에로티즘’임을 알지 못하는 ‘소녀’는 자신의 육욕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 결과 ‘아이’와의 결별을 자초합니다. 보통의 소설에선 소년기 에로티즘이 이니시에이션 서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성에 대해 무지하던 상태에서 어떤 계기를 만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인의 성 생활로 입문하는 것이 소년기 에로티즘 서사의 일반적 패턴입니다(「소나기」). 그 점을 고려한다면 이 부분은 소년기 에로티즘 중에서도 하나의 이상(異常)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장면인데 단순하지 않은 심리학적 내포가 엿보입니다. 황순원 소설의 소년 주인공들이 이니시에이션 서사에만 봉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왜 육체의 에로티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가 초점이 된다는 겁니다. 연령이나 신체 발육의 문제가 아닌 또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늪」에서는 그 반대의 양상이 묘사됩니다. 화자 주인공의 여성의 건강한 육체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제시됩니다. 여체(女體)에 대한 페티시즘적 집착은 남성 주인공의 육체적 열등의식의 프리즘을 통해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도 역시 황순원 소설 특유의 심리학적 에로티즘 미학의 출현을 목도합니다.     

...태섭은 소녀의 오른 손목에 감긴 붕대를 지켜보다가 다시 빙그르르 돌려고 하는 소녀의 팽팽한 가슴에서 호크가 벗겨지면 어쩌나 하고, 원반을 피하듯이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물러나 앉는 태섭의 무릎에 소녀의 몸뚱이가 와락 와 쓰러졌다. 태섭이 미처 팔로 소녀의 몸뚱이를 받을 새도 없이 태섭의 약한 몸은 소녀의 풍만한 육체를 감당하지 못하고 뒹굴고 말았다. (「늪」, 1-21,22)     


‘태섭’은 「별」의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한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심정의 에로티즘’을 추구하게 했던 아니마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된 듯합니다. 이제 그는 ‘육체적 에로티즘’으로 나아가려는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여체의 육감적 형체에 대해 굳이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며 에로티즘의 세계를 동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두려움이 앞섭니다(‘팽팽한 가슴에서 호크가 벗겨지면 어쩌나’). 그래서 그의 에로티즘은 육체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초대는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에로티즘의 성문(城門) 앞에서 서성거릴 뿐입니다. 몸은 성인이지만 마음은 아직 ‘아이’에게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자신을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자의식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늪」에서는 육체적 에로티즘에 눈뜨는 한 청년의 내면 묘사가 정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성(性)에 대한 동경과 여체에 대한 관심을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하고 풍만한 여체(여성성) 앞에서 위축되고 압도되는 나약한 남성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외형적으로 이니시에이션 서사의 전형적인 틀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늪」은 그것 이상입니다. 소설의 서두에서 묘사되는 ‘소녀’의 집은 모녀만 사는 집으로 일종의 우로보로스적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서는 ‘태섭’의 눈에는 ‘소녀’보다 그녀의 어머니가 먼저 들어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에로티즘의 성(城)에서 추방당하여 홀로 유폐되어 있는 숲속의 마녀, 그레이트 마더입니다. 그녀는 ‘태섭’의 친구 부인을 흠잡으며 자신의 그런 사정을 ‘태섭’에게 전합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숨찬 음성으로, 부인과는 한 고향이어서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안다는 말로 부인의 집에서는 지금 남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오랫동안 말썽이 많다가 종내 부인이 자기의 마음대로 붙고 말았다는 말을 하였다. 붙었다는 자기 말에 소녀의 어머니는 스스로 귀밑을 붉히고 이어서, 부인은 여태까지 본가에는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후모 밑에서 자라난 탓이라고 하였다. (「늪」, 1-11,12)     


‘소녀’의 어머니는 ‘태섭’을 소개한 친구의 부인을, 머리 모양과 복장에 대한 규탄에서부터 시작하여 종내에는 야합의 당사자로, 불륜의 주체로, 매도합니다. 그런 매도는 오히려 성과 인습에 자유로운 그녀에 대한 선망의 표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붙었다’라는 표현으로 그녀는 자신의 그런 처지와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런 그녀가 딸에게 젊은 가정교사를 ‘붙이고’는 둘 사이를 ‘흘깃거리는 시선’으로 엿봅니다. ‘태섭’은 그 다음날부터 그녀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받아가며’ 성과 인습에서 자유롭기를 원하는 ‘소녀’에게 개인교습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건강한 혀와 입술’과 ‘풍만한 무릎’과 ‘팽팽한 가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작가는 ‘소녀’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방출된 에로티즘 에너지까지 합해서 곱으로 ‘태섭’에게 그것을 전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텍스트무의식은 ‘소녀’가 그녀의 어머니의 대리자이거나 대용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어보라고 권합니다.     


의심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태섭’, ‘소녀’, ‘눈썹이 검은 소년’의 삼각관계도 미심쩍습니다. ‘태섭’과 ‘소녀’, 그리고 ‘눈썹이 검은 소년’이 만들고 있는 삼각관계를 무의식의 아니마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년’은 ‘태섭’의 그림자일 공산이 큽니다. 그가 ‘소녀’(어머니의 몸)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펼친다는 것은 그러므로, 페르조나의 일방적인 독선에 저항하는 내적 인격으로서의 그림자가 취하는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행동’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텍스트무의식은 ‘소녀’가 ‘태섭’의 ‘소년과 함께 떠난대도 멀지 않아 불행해질 것이라고’ 하는 말에 ‘태섭’의 뺨을 갈기며 ‘악마, 악마하고 두어 번 부르짖’는 장면을 보면 거듭 확인될 수 있는 일입니다. 텍스트무의식은 균형을 깨는 페르조나의 일방적 독주를 ‘악마’로 간주합니다. 여기서도 ‘소녀’는 ‘어머니’가 보낸 척후병의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도 그녀의 역할은 여체(여성)의 실존을 ‘태섭’에게 보여주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태섭’이 두려워하던 ‘늪’이 ‘소녀’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것, 주체의 아니마는 유폐된 모성의 추방된 에로티즘 욕구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그녀의 대리자에게, 그녀의 몸에, 관심을 드러내지만 정작 그녀 자체와의 결합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 이 때 여체의 심리학적 내포는 모성애에 집착하는 주체가 돌아가고자 하는 ‘어머니의 몸’일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집니다.    

 

텍스트무의식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늪’인 것도 그러한 맥락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소녀의 집이 늪이고, 그녀의 어머니가 늪이고, 여체가 늪이고, 그 앞에 선 태섭의 마음도 늪입니다. 모든 것이 늪, 즉 우로보로스라는 것이지요(연금술사들이 태초의 근원 물질 상태를 지칭하던 ‘우로보로스(Uroboros)’는 본디 이집트에서 태양신의 순회(巡廻)를 표상하던 우주적 원이었다. 융심리학에서는,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ring-snake)이 표상하듯, 시작과 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시초로서, 반대짝들이 각기 분리되기 이전의 공존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무의식의 심연으로서의 그레이트 마더는 우로보로스가 인격화된 것이다). 모럴의 간섭도 없고 이성의 명령도 없는 곳이 우로보로스입니다. 태섭은 우로보로스의 강한 흡인력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겨우 빠져나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태섭이 화분에 물을 주며 안정을 되찾는다는 묘사는 ‘소녀’가 떠난 후, 자신이 비로소 늪-우로보로스적 에로티즘-에서 벗어나 새 생명(아니마 갈등에서 벗어난 주체적 에로티즘)의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는 고백으로 읽혀집니다. (이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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