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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7. 2019

사랑에 눈먼 자

동방불패의 사랑

사랑에 눈먼 자


‘남녀노소(男女老少)’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람’입니다. ‘음식남녀(飮食男女)’가 식색(食色)을 가리키는 것과 한 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남녀 사이의 일’과 ‘노소 차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런저럼 단견(短見)들입니다. 오랜만에 영화 『동방불패』(1991)의 몇 장면을 보고난 뒤 든 생각들입니다. 주인공 동방불패(임청하)의 모습이 남녀(男女)를 아우르고 노소(老少)를 분간키 어렵게 하는 것을 보고 생긴 잡념인 듯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동방불패의 남녀추니(hermaphrodite)적 성격과 자태는 영상미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수준, 가히 독보적인 경지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물경 20년이 흐른 뒤에도 그때의 감흥이 여전한 걸 보니, 또 그만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정히 그런 것 같습니다.


『동방불패』를 보다 보면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깁니다. 다름 아닌 ‘영호충(이연걸)은 과연 동방불패(임청하)의 정체를 몰랐을까?’라는 의문입니다. 영화는 시치미 뚝 떼고 ‘영호충은 그가 만난 이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왜색풍의 여인이 동방불패라는 것을 종내 몰랐습니다. 그가 그녀를 알게 되는 것은 최후의 결전이 이루어지는 묘족의 요새에서였습니다’라고 강변합니다. 그걸 부정하면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막된’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내내 찝찝했습니다. 영화의 서사구조 상, ‘적과의 동침’을 합리화하는 수단이기도 하고(무지의 소산), ‘사제들의 죽음을 방조한’ 범죄의 혐의를 부정하는 알리바이(의지의 부재) 구실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호충이 동방불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절대로 인정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영호충은 동방불패의 정체를 정말 몰랐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영호충의 혐의는 딱 하납니다. ‘그는 사랑에 눈 먼 자였다’라는 겁니다. 작가(감독)는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몇 가지 ‘줄타기’를 주인공들에게 강요합니다. 서로를 모른 채(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서로에게 ‘위험한 불장난’을 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동방불패는 자신의 몸을 대신(代身)하도록 애첩 시시를 강박해서 결국 그녀가 영호충과의 하룻밤을 보내고 죽게 만듭니다. 영호충은 시시의 몸을 동방불패로 상상(오인?)하며 빠져들고, 시시는 영호충의 몸을 동방불패의 그것으로 상상(고문?)하며 ‘죽음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을 구현하고(이제 시시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사(情事)를 환희와 분노 속에서 바라보며 동방불패는 무참한 살상(殺傷)에 나섭니다. 그 부분은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된, 영호충과 동방불패가 벌인 가장 위험한 곡예, 줄타기 장면이었습니다.‘줄타기’란 무엇입니까? 오직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곡예가 아닙니까? 영호충과 동방불패의 ‘줄타기’는 그들이 절대로 서로를 위해(危害)할 수 없다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고 만난 것입니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본 사이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천보를 양보한다면, 적어도 그들은 무의식적 차원에서에서라도 서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사랑에 눈 먼 자들’이었으므로 모든 지각(知覺)과 판단을 일시 정지 시켜놓았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결전’에서 화장을 하고 여장(女裝)을 한 동방불패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영호충의 태도는 상황논리 상 ‘정지된 판단’을 다시 가동시키겠다는 의사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직 사제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한다’라고요. 너와의 사랑은 생각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랑이 식었을 때, ‘사랑에 눈 먼’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남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집안(가문)을 생각하고, 부모들의 기대를 생각하고, 자신의 장래를 생각해서,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며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물론, 무슨 말로 호도하든 ‘판단 재가동’의 원인은 단 하나뿐입니다. 사랑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으로 눈멀어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들이 갑자기 ‘죽고 사는’ 문제로 대두됩니다. 영호충의 말이 딱 그렇습니다. 의리 없는 것들의 소행이지요.


그러나, 동방불패는 영호충의 ‘사제들의 죽음’ 운운에 콧방귀를 뀝니다. 그건 아니라는 걸 그는 압니다. 그도 원래 ‘남자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호충의 배신을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대체재가 있기 때문에 잔꾀를 부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부터 죽이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질투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동방불패의 작심(作心)은 죽음을 불사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인 질투의 수준을 훨씬 상회합니다. 영호충의 여자 중 하나인 임영영의 아버지 임아행은 벌써부터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인이지만 노현자(老賢者)로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거세를 해야 규화보전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고 하자 주저없이 그것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왜 사느냐?’ 정도는 아는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방불패의 질투심에 때맞추어 불을 지릅니다. ‘네가 여자가 되어서 그와 연인관계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너는 세 번째에 불과하다’라고 약을 올립니다. 젊고 예쁜 내 딸이 퍼스트고 오래된 연인인 스승 악불군의 딸이 두 번째고, 분수 모르고 성전환증을 앓고 있는 늙은 너는 고작해야 세 번째에 불과하다라는 겁니다. 그 말에 동방불패는 이성을 잃습니다.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은 불패의 강적을 이기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결국 끝까지 ‘사랑에 눈먼 자’였던 동방불패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스스로 자멸(自滅)합니다.

그러나, 영화 『동방불패』가 ‘사랑에 눈먼 자들’에 관한 영화였다면, 그래서 주인공이 동방불패였다면, 동방불패는 민족(묘족)의 승리 대신에 자신(사랑)의 승리를 취한 ‘승리하는 인간’이 됩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한 가닥 양심은 남았었는지, 영호충도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의 ‘환상 속의 그대’로 남으려는 동방불패에게 마지막으로 ‘줄타기’를 시연합니다. 치명상을 입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그녀에게 몸을 던져 그녀를 부여잡은 채 ‘그날 밤의 여자가 당신이 아니었다고 말해 달라’고 조릅니다. 당연히 동방불패는 거절합니다. 계속 ‘사랑에 눈멀어 있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죄의식으로 끝까지 고통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방불패는 마지막까지 ‘사랑에 눈먼’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는 살리고 자기는 죽습니다. 과연 끝까지 ‘환상’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환상’의 내용은 나중에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집안 일로 영호충을 부르는 사람이 있군요. 우리집 동방불패는 여태 ‘사랑에 눈먼’ 영호충을 마치 가내(家內) 하인 부리듯 합니다. 제가 무엇을 하고 있든 관계 하지 않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호출입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지각과 판단을 정지시키고 ‘마누라 없었으면 벌써 쪽박 찼다’라는 규화보전의 절대무공 비결만 외우라고 강요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그냥 웃어 넘깁니다만, 속으로는 한 번씩 그로 인한 소화불량(심리적)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왠고하니, 제가 어릴 때도 그런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더 끔직한 건, 그 말이 ‘말이 씨가 된다’고, 어린 제게 현실로 닥쳐왔었다는 겁니다. 우리집 동방불패가 그걸 알고 그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아니면 ‘조자룡 헌칼 쓰듯’ 마구 휘둘러대는 건 아닌지, 30년을 넘게 같이 살면서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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