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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26. 2019

환상 혹은 환멸 : 산해경(山海經)

더블린 사람들

환상 혹은 환멸 : 산해경(山海經)


환경, 특히 장소(場所)가 인간의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세계관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의 환경에 대한 해석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면, 장소에 대한 그의 생각이 그가 만드는 모든 문화적 상징물에 어떤 식으로든 침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화적 상징물 중 문자나 그림으로 기록되는 것들에 반영된 이른바 ‘장소 이미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문학이나 예술, 혹은 신화나 전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마 환상(幻想) 아니면 환멸(幻滅)일 것입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은 아무런 통계나 유추가 없는 실정입니다. 물론 그 중간도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애증병존’의, 장소에 대한 그리움과 경멸이 마치 한 작품 안에서 이종격투기처럼, 혹은 엉거주춤하게 뒤엉켜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넓은 의미의 ‘환상’ 쪽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라도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환상’쪽일 것 같아서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미지의 장소에 대한 동경이거나,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라면 ‘환상’입니다. 학창 시절의 꿈이 배여있는 모교의 교정이나 첫사랑과의 추억이 맺혀있는 장소를 추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산해경, 최인훈(구운몽)이나 이제하(태평양) 황석영(개밥바라기)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나) 등의 몇몇 작품들, 그리고 첫사랑을 그린 몇몇 영화들이(러브레터, 건축학개론) 생각납니다. 반대로, 전쟁이나 피난의 장소가 등장하는 이야기와 영화들, ‘떠나야 할 곳’으로의 장소를 그린 것들은 ‘환멸’ 쪽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황석영(탑) 김승옥(무진기행) 윤흥길(기억 속의 들꽃)의 소설, 그리고 몇 편의 전쟁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고지전)와 사이코드라마(셔터 아일랜드, 디 아더스)가 생각납니다. 그런 작품들은 장소(공간)에 대한 환멸이 뚜렷합니다. 그런 작품들은 당연히 ‘환멸의 플롯’을 가집니다. 윌리엄 포크너(음향과 분노), 헤밍웨이(노인과 바다), 이문열(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등의 몇 작품은 ‘애증병존’일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환멸의 플롯’을 내세우지만 항상 그리움의 반서사(反敍事)를 안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대로 넓게 보면 ‘환상’ 쪽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머리 속에서 기억되는 공간은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환상 아니면 환멸의 대상입니다. (페이스북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생각나는 대로 작가와 작품들을 나열했습니다. 나중에 이 소설들에 대해 길게 쓸 때 다시 예의를 갖추어 인용하겠습니다)


『산해경(山海經)』은 그 표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산과 바다, 인간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장소에 대한 기록입니다. 아마 ‘장소에 대한 환상’으로서는 세계 굴지의 기록일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의 그림도 세세하게 첨부해서 ‘우리가 직접 보고 듣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을 강하게 전달합니다. 미지(未知)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환상’이 그래서 아마 지금껏 그 효용을 인정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제목에 ‘경(經)’이라는 말이 붙은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지금 보면 그 내용은 한 마디로 허황된 것 일색인데(그때도 아마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걸 경전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가치를 높게 쳐달라는 요구일 겁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삶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말씀’들을 쉽게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진 ‘스승’도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보면 그 시작은 대개 ‘스승을 찾아 떠나기’로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기록된 것들의 가치’도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산해경은 ‘기록’으로 본다면 전혀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환상’의 가치만 있습니다. 개중에 재미있는 대목이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우리 단군 신화의 화소(話素)가 거기서도 얼핏얼핏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동쪽으로 10리를 가면 청요산이라는 곳인데 바로 이곳은 천제(天帝)의 숨겨둔 도읍이다. 여기에는 가조(駕鳥)가 많이 산다. 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선저는 우 임금의 아버지 곤이 누런 곰으로 변화했던 곳이며, 그곳에는 달팽이와 대합조개가 많다. 산신(山神) 무라가 이 지역을 맡고 있는데 그 형상은 사람의 얼굴에 아름다운 표범무늬, 가는 허리에 흰 치아를 하고 귀를 뚫어 고리를 해 달고 있다. 그 부딪히는 소리가 구슬이 울리는 듯한 것이 이 산은 정녕 여인네의 산이다. 진수가 여기에서 나와 북쪽으로 황하에 흘러든다. 산속에 이름을 요라고 하는 새가 있는데 오리 같이 생기고 붉은 눈과 빨간 꼬리를 하고 있다. 이것을 먹으면 아이를 많이 낳게 된다. 이곳의 어떤 풀은 간초(葌草)와 같이 생겼는데 줄기는 모나고 꽃은 노랗고 열매는 붉으며 뿌리는 고본(藁本)과 같다. 이름을 순초(筍草)라고 하며 이것을 먹으면 얼굴빛을 곱게 만들 수 있다. (『산해경』(정재서 역), 중차삼경2)


주로 보지 못한 동물이나 식물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인용문에서처럼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곰, 산신, 귀에 단 방울, 얼굴빛을 곱게 만드는 순초 같은 것들이 우리의 단군신화의 내용과 겹치는 화소들입니다. 직접적으로 현재의 우리 땅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발해의 동북쪽으로 ‘군자국(君子國)’이나 ‘청구국(靑丘國)’이라는 곳이 있다고 간략하게 소개도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은 ‘(그곳 사람들은)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무궁화)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 정도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서에서도 많이 보던 내용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책들은 ‘기록’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에둘러 온 것입니다. 『산해경(山海經)』은 언제까지나 ‘불패의 환상’으로 존재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환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허랑된 ‘기록’들도 많이 있어야 합니다. 문학과 예술은 어쩌면 모두 다 『산해경(山海經)』의 후예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시야(視野)에 굴복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끔찍한 사실입니다. 그러고 말기에는 인생이 너무 허무합니다. 너무 인간이 보잘 것 없는 곳에 놓여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실망이 ‘환멸’을 낳습니다. 그것을 안긴 ‘보잘 것 없는 장소’를 나무라고, 그 장소에서 머물던 ‘허무한 시간’을 원망합니다.


“나의 의도는 우리나라 도덕사(道德史)의 한 장(章)을 쓰는 것이었으며, 나는 더블린이 마비의 중심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이야기의 장면으로 택했다. 나는 무관심한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단계로 그 도시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즉 유년기, 청년기, 성숙기, 그리고 대중생활이 그것이다. 이야기들은 이러한 순서로 배열되었다. 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주도면밀하고 천박한 문체로 썼으며, 그를 제시함에 있어서 보고 들은 바를 변경하거나 <중략> 그 형태를 감히 망가뜨리려는 자는 대담한 자라는 확신을 갖고 그렇게 했다. 나는 이 이상 더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쓴 바를 변경할 수 없다.”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 인터넷 검색]


『더블린 사람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22세에서 25세 사이에 쓴, 이를테면 ‘작가 최초의 소설’ 15편으로 이루어진, 주옥(珠玉)같은, 금세기 가장 대표적인 단편소설집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혼의 혁명’이 그러하듯, 이 소설집도 처음에는 아주 강한 인습의 저항에 당면합니다.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구절, 실재적인 인물과 장소의 사용, 불경스런 정치적․종교적 발언, 거침없이 쏟아내는 천박한 문체…. 독자들의 공격에 노출될 것이 두려운 출판사들은 조이스의 ‘보고서’를 활자화할 것을 망설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집을 ‘환멸의 고향 - 더블린’에 대한 별사(別辭)로 치부합니다. 떠나기를 작정한 자에게 무엇이 두려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조이스는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 작품집의 문체와 주제, 특히 그 중에서도 그의 예술적 목적에 대해 그렇게 강변(强辯)했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더블린 사람들』은 주제 면에서 일관성을 띤 분명한 공통의 근거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은 공히 세기(世紀)가 전환될 무렵의 더블린에서의 삶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아일랜드의 도덕사를 기술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그의 단편들이 그곳 더블린에서의 구체적인 일상적 삶을 묘사하는 것을 통하여, 정치 ․ 사회 ․ 종교를 총망라하는 정신적 마비 또는 부패의 중심지로서의 더블린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단편들은 그들 주인공들의 정신적 마비, 구체적인 삶에서 도피하려는 환상과 발버둥, 그리고 의지의 박약으로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좌절과 환멸을 제시합니다. 조이스는 ‘전통적 올가미(traditional noose)’에 얽매인 채, 우리에 갇힌 ‘어쩔 수 없는 동물(helpless animal)’처럼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는 ‘더블린에서의 삶’을 ‘주도면밀하고 천박한 문체’로 묘파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이상 인터넷 검색 참조)


저도 한때, 100여년 전 더블린을 바라보던 조이스의 그 환멸 어린 시선에 크게 공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더블린 사람들』에 자극 받아, 몇 편의 소설을 구상한 적도 있었습니다. 비슷한 형식으로 내가 몸담고 있는 도회의 ‘어쩔 수 없는 동물(helpless animal)’의 삶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물론 잘 되지 않았습니다. 조이스의 더블린이나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에 대한 오마쥬는 저의 빈약한 재주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그러나?), 여전히 ‘나의 도회’는 조이스의 더블린처럼, 기회만 있으면 버려야 할, ‘환멸의 고향’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저의 두 아이를 세상에 내보낸 곳도 바로 이 도회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아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낼 때의 ‘환상’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한, 아직 이 도회는 제게 『산해경(山海經)』의 한 장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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