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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31. 2019

견물생심(見物生心) 공부법

문식력

견물생심(見物生心) 공부법


문식력(文識力, 읽고 쓰는 힘)의 차원에서 발견되는 좀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순전히 저의 경험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학문적으로(통계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읽기 능력에 ‘쉬운 것은 잘 못 푸는데 어려운 것은 잘 푸는’ 모순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저등 문식력을 건너 뛴 아이들은 쉬운 것이 왜 ‘푸는 대상’이 되는지를 아예 모를 수가 있습니다). 시시한 공부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아이가 어려운 공부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쉬운 예를 찾자면, 평소 에이스가 아니었는데, 그 어려운 고시공부를 1,2 년 안에 그냥 끝내고 최연소로 합격하는 케이스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경우를 ‘행운’의 결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사자는 분명 남들보다 뛰어난 고등 문식력을 타고난(습득한) 문식영재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음악에서 절대음감을 가지고 태어나는(태교의 영향도 포함) 아이들이나 한 번 들은 노래를 바로 악기로 연주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처럼 문식력에도 그런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차원을 ‘견물생심(見物生心)’ 문식력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원래의 말뜻을 비틀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합당한 뜻을 새긴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심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지요. 그 비슷한 개념을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명도(程明道)의 『정성서(定性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릇 천지의 항상됨은 만물에 두루 (존재)하면서도 사심이 없는 데 기인하고, 성인의 항상됨은 만사에 순응하면서도 사사로운 정(情)이 없는 데 기인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확 트이고 공평하여 사물과 접촉할 때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제일이다. ……
성인이 기뻐함은 대상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성인이 성냄은 대상이 마땅히 성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기뻐하고 성냄은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인이 어찌 대상에 순응하지 않겠는가? 그가 어찌 밖을 따르는 것을 그르다 하고 (마음) 안에서 구하는 것만 옳다고 하리요!


성리학자들에 의해 회자된 이 글의 요점은 <곽연이대공 물래이순응(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이라는 10자에 있다. 즉 나의 사사로운 의도적 분별(自私用智)를 없애고 확 트인 마음으로 대상에 따라 도리에 맞게 순응하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항상 범하는 오류인 치우침과 편견을 없애는 핵심은 사심(私心)을 없애는 것이며, 또 우리는 마음 안으로만 추구하고 외부 세계를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치우침이 없는 그런 <중정(中正)의 도>를 어떤 방법으로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수중, 「유가의 인간관」,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러니까 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이라는 말씀이 제가 말하는 ‘견물생심’과 일맥상통하는 것인 셈입니다. 옛 성현들은 그것을 학문(수양)의 한 경지로 취급합니다. 또 공부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문식력의 한 경지나 수준으로도 이해됩니다. 텍스트가 어려우면 사심(私心)의 출입을 방조할 수도 있고 엄격하게 통제할 수도 있습니다. 사심의 출입이 방조되면 이른바 ‘투사적 독서’가 됩니다. 텍스트와는 전혀 상관없는 오독이 나오게 됩니다. 자기 안의 ‘절실함’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종횡무진, 텍스트를 오염시킵니다. 이 경우는 당연히 고등 문식력(견물생심)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심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경우는 고난도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고등 문식력의 존재(잠재적)를 전제로 합니다. 의미 구성에 필요한 텍스트 내적 연관성을 나름대로 구축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에게만 그런 상황이 허용됩니다.


만약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견물생심 공부’에 능한 사람들이 따로 있어서(타고난 것이거나 습득된 것이거나) 이들에게는 일반 보통교육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나 과업을 부여해야 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다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학교 성적(내신)이나 수능평가 점수(저등 문식력 평가 위주로 되어 있는)로 등위를 매기는 일만 할 것이 아니라 고등 문식력을 평가해서 그 재능에 맞는 교육을 당사자들에게 제 때에 제대로 베푸는 방도를 조속히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공부는 뇌 발달과 연관이 있어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잘 키워서 그들에게 법도 맡기고 철학도 맡기고 문학도 맡기고 언론도 맡겨야 합니다. 물론 현재의 대입 제도로는, 그리고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으로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물래이순응’의 길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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