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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02. 2019

인정받고, 손해 보지 않고, 똑똑하게 사는 방법

윤리지능

 인정받고손해 보지 않고똑똑하게 사는 방법


...“의도적이고 악질적인 고객의 요구는 참아야 하나, 거부해야 하나?”, “친구의 불륜을 모른 척해야 할까, 따끔하게 충고해줘야 할까?”, “12세 아들과 함께 영화관에 갔더니 알림판에 <어린이(11세까지) : 반값>이라 적혀 있다. 제값을 낼까, 살짝 속일까?”, “데이트 때 꼭 입고 싶은 드레스가 있는데 돈이 없다. 백화점은 구매 후 2주 내엔 환불해 주는 제도가 있다. 하루만 입고 환불받을까, 말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때로는 뭐가 옳은지 애매할 때도 있고, 뻔히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생명윤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윤리 전문가로 활동하는 저자 부루스 와인스타인은 미국판 ‘애정남’, 즉 ‘애매한 것을 정리해 주는 남자’이다. 잣대는 윤리지능(ethical intelligence). 와인스타인은 ‘지능지수(IQ)와 감성지수(EQ)는 기본, 이젠 윤리지능 시대’라고 주장한다. 감성지능은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는 해주지만 당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으며 알려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와 나에게 상처를 주지도 입지도 않으며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똑똑한 ‘윤리지능’이 필수라는 것이다. 애매한 상황을 구별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기준도 내놓는다. 그 원칙은 1.남에게 해 끼치지 마라. 2.상황을 개선하라. 3.다른 사람을 존중하라. 4.공정하라. 5.사랑하라.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2012. 6.2)]


‘윤리지능’이란 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요즈음 주변(주로 직장 안에서입니다)에서 ‘윤리지능’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들을 자주 봅니다.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자율적 윤리규범이 많이 요구되는 직장에서 환영받는 윤리지능은 따로 있습니다. 수십 년 그런 데서(여기저기 좀 옮겨다녔습니다) 직장생활을 해본 경험칙에 의하면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무조건 하지 않으면 됩니다. 참으면 참을수록 윤리지능이 뛰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면 예외 없이 “앞뒤 못 가린다. 자기밖에 모른다, 생각이 많다.”와 같은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외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둘씩 발호하게 되면 직장이 제2의 가정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비록 시의적절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삶을 ‘지능이론’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비학문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종의 처세술개론에 해당할만한 내용을 학술적인 이론인 양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윤리’라는 필수과목을 ‘지능’ 안에 가두어서 선택과목화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윤리지능’이라는 말은 지식을 팔아서 생계를 도모해야 하는 책상물림들의 무책임한 발설(發說)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성지수(EQ)나 다중지능과 관련된 언설들을 들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간사는 포괄적 이론으로 다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도 있고 윤리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브루스 와인스타인의 ‘윤리지능’이라는 말은 아마 ‘윤리적으로 똑똑하게, 손해 보지 않고 살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는 개념인 듯합니다. ‘직장 상사가 아랫사람을 혼낼 때도 윤리적으로 똑똑한(손해보지 않는) 방식은 *적절한 환경(다른 사람이 없는 가운데) *긍정적인 것으로 시작하고 *사람이 아닌 ’행동‘에 초점을 맞추며 *(의욕을 고취시키는) 고무적인 분위기로 마무리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결국 처세술입니다.

그 정도가 ‘윤리지능’이라면 저도 매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어제도 검도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 강평 시간에 꼭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정말 모두들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출석해서 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구누구의 이러저러한 발전적인 모습은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아주 흐뭇한 광경이었습니다. 마지막 시합 때의 (누구누구의) 이런저런 태도와 기술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다만, 이런저런 부분에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고치면서 검도가 느는 것입니다. 저도 수련생 시절에 이러저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계속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또 호구를 정비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다가가서 개별적으로 한 마디씩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매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선생님들에게 배운 가르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윤리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윤리지능’은 그런 게 아닙니다. 긴 설명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인용문 하나면 다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마침 어제 페이스북에 올라와서 또 저의 ‘윤리지능’을 일깨웠던 말입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를 잡아갔다. 나는 거기에 대항하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유태인을 잡아갔다. 나는 항거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노조원을 잡아갔다. 그 때도 나는 항거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카톨릭신도를 잡아갔다. 그 때도 나는 항거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신자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잡혀갔다. 그러나 내가 잡혀갈 때는 이미 항거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 니몰로 목사

<2012. 6. 2. 오늘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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