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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03. 2019

훔친 자가 도망쳐서 돌아오지 못한다

주역은 좋은 책

훔친 자가 도망쳐서 돌아오지 못한다     


책읽기의 목적 중 하나가 ‘대행(代行)자 찾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 대신 싸워줄 자, 나 대신 참아줄 자, 나 대신 성공할 자, 나 대신 바꿔(바뀌어)줄 자, 나 대신 사랑할 자, 나 대신 죽을 자를 찾는 일이 책 읽기의 한 주요한 용도입니다. 대리만족을 준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독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서가 주는 대리만족에 만족합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기술을 지닌 기술자들의 동영상을 즐겨 보는 심리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현실이 주지 못하는 만족을 관념의 유희, 혹은 환상으로 보상받습니다. 그래서인 모양입니다. 옛부터 장인(匠人) 정신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는 책과 동영상을 멀리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제가 검도를 처음 배울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물론 책읽기를 행동으로 나서기 위한 전초전으로 삼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술이나 기능을 익히기 위한 지침서들의 독자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책이 행하는 ‘대행’에 만족치 못하고 어렵사리 직접 행동으로 투신(投身)하는 것을 즐깁니다. 생각이나 기분만의 대리만족보다는 고통스럽게 쟁취하는 경험의 중요성을 중히 여깁니다. 그런 이들이 나중에 또 자기만의 책을 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읽기의 유전자는 대행과 실행(實行)을 오고가며 대대로 전승됩니다. 허위전환을 부추기는 출판사들, 서점들, 미디어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들이 유지하려고 애쓰는 ‘대행자 찾기 책읽기 시장’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것 없이는 ‘진짜 저자’들도 탄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천이 없으면 ‘개천에 용 날 일’도 없습니다. 깊은 물만 물인 것은 아닙니다. 온갖 물이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비단 책 읽기 시장만 그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생사 모든 것이 그런 ‘가짜/진짜’의 변증법 안에 있습니다. 정치가 가장 대표적인 ‘바보들의 시장’입니다. 부패한 정치인들을 보고 “왜 저런 자가 승승장구하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시장의 ‘대행자 찾기 게임룰’을 잘 모르는 이들입니다. 정치판에서는 대행자들의 성공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선택의 이유가 됩니다. “저런 자도 성공하는데...”가 없으면 정치판 자체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진짜 독자만 찾아 헤매다 얼마 안 있어 지쳐 쓰러지는 '순진한 저자'들만 있어서는 인간 세상이 유지되기 힘듭니다. 옳은 일만 하는 실패자들은 결단코 우매한 독자들의 대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에서 다 성공하고도 정치에서만 실패하는 경우도 왕왕 봅니다. 하는 일마다 성공이니 정치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여기면 큰 오산입니다. ‘대행자를 구하는 심리’를 무시하고 ‘뼈를 깎는 실행’만 요구하는 책은 절대 팔리지 않습니다. 최근의 선거판에 나서고 있는 ‘옳은 일만 하는 실패자’, 대행자를 찾는 독서를 무시하는 ‘순진한 저자’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을 잃은 자라도 실행에 몰두하고 처신에 적중(的中)하면 굳이 도적을 쫒지 않아도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때가 온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이 눈에 띕니다. ‘옳은 일을 도모하는 꾸준한 실패’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육이는 지어미가 머리 장식을 잃음이니, 쫓지 않아도 이레 만에 얻으리라. (六二 婦喪其茀 勿逐七日得)

-- 중정으로 아주 문명한 데에 처하여 오효에 응하니, 음중에서 빛나고 성대한 것이다. 그러나 초효와 삼효 사이에 거했으나 서로 가깝되 어울리지 아니하여, 위로는 삼효를 받들어 이지 않고 아래로는 초효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저 성대한 음이 두 양 사이에서 가까우나 어울리지 않으니 침범당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상기불(喪其茀)’이라 하였다. 지어미라 칭한 것은 스스로 지아비가 있으나 타인이 침탈했음을 밝힌 것이다. 불(茀)은 머리장식이다. 중도로 곧고 바른 덕을 가졌으니, 침탈당한 부인을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게 된다. 기제(旣濟)의 때는 사도(邪道)를 용서하지 않는다. 때가 이미 밝고 준엄하고 또 많은 사람이 도와주니 훔친 자가 도망쳐서 돌아오지 못한다. 이 형세를 헤아려보면 이레가 지나지 아니하여 자기가 쫓지 않아도 스스로 얻게 된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73~474쪽]   

  

주역 63. 기제괘(旣濟卦) 육이(六二)의 효사입니다. 기제는 모든 ‘일이 이미 처리되어 끝남’을 의미합니다. 끝난 일은 달리 어떻게 뒤집어 볼 수가 없으므로 때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주역은 인간사를 마치 자연계의 현상인 양 설명합니다. 저에게는 주역 읽기가 ‘속된 대행자 찾기’입니다. 실행의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만 저를 돌아다보는 한 계기는 충분히 됩니다. 그 안에서 때로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고 계시 비슷한 것을 안기기도 합니다. “너의 실패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으니 너무 애달파 하지 말지니라”, 그 말씀을 듣고 쓸데없는 자괴감 하나를 덜어냅니다. 주역은 역시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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