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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13. 2019

도(道)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

기계치

()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나라에 여행하고 진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땅에 굴을 파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밭에 물주는 일이 쓰는 애에 비해서는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당신은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이 말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뒤는 무겁고 앞은 가볍습니다. 아주 쉽게 물을 퍼내는데 그 빠르기가 엄청납니다. 그 기계 이름을 두레박이라 부르지요.” 밭일을 하던 노인이 순간 얼굴을 붉히더니 곧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그런 일이 생기면 또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 속에 차 있게 되면 순진 결백한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그러면 도가 깃들 수가 없다는구려.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오. 도(道)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얼마 후에 밭일 하던 노인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자공이 답했다. “공구(孔丘)의 제자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그 널리 배워서 성인 흉내를 내며 허튼 수작으로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 노래하여 온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자가 아니겠소! 당신은 바로 당신의 정신의 작용을 잊고 당신의 육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야 도에 가까워질 것이오. 그대의 몸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겠소. 빨리 가던 길이나 가시오.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자공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정신이 황망하였다. 30리나 가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장자』 외편, 「천지(天地)」, 안동림 역주, 『莊子』, 및 조관희 역해 『莊子』 참조]     


‘기계치(機械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낯선 기계만 보면 주눅이 드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도 한 때는 소문난 기계치였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형광등 하나 갈 줄을 몰랐습니다. 결혼 초까지 줄곧 그랬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이 하나 쑥 들어왔습니다. ‘이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작정을 했습니다. 덤비자, 그렇게 도전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보이는 것마다 무조건 손을 대 보는 습성을 길렀습니다. 겁내지 않고 꾸준히 덤볐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스스로 ‘마이더스의 손’으로 자부하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집안에서만이지요. 집사람이 인터넷으로 주문해 사오는 각종 반조립 전자(전기) 기구도 제가 다 조립해 냅니다. 새로 산 TV 사용법도 제가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덩치 큰 2,3단 옷걸이 같은 조립 가구도 혼자서 잘 꿰맞춥니다. 식탁 다리도 톱으로 잘 잘라내고요. 차를 새로 사도 제가 먼저 다 만져본 다음에 그 결과를 집사람에게 일일이 보고합니다. 그 정도면 기계치 신세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거라 여깁니다.     


위에서 인용한 『장자』 「천지(天地)」 편 이야기는 자공이 위포자(位圃者, 밭일 하는 사람)를 보고 잘난 척하다가 개망신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한 방 얻어터지고, 30리나 걸어가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깨져도 크게 깨진 형국입니다. 스스로 도를 추구한다는 자가 도인을 보고도 한 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던 겁니다. 그를 단순한 기계치 정도로 본 것이 부끄러웠던 겁니다. 위포자는 자공을 나무랍니다(도 닦는 것을 몰라본 것에 대해 크게 화를 냅니다). 도를 위해 스스로 기계치를 선택한 것이지 기계의 편의성과 유용성을 몰라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외물(外物)의 작용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공이 그 말의 내용(내용이 주는 교훈) 때문에 부끄러웠던 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실 그런 말은 중인(衆人)들이나 들을 말이지 공자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자공이 들을 말은 아니었던 겁니다. 요즘 항간에서 떠도는 ‘격(格)’과 관련된 문제-공부의 격-라고도 볼 수 있는 거지요. 도인이 도인을 한 눈에 못 알아보면 결국 그 중 한 사람은 도인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우화의 내용 상 그렇다는 겁니다. 이 우화는 그 끝을 자공과 공자의 대화로 맺습니다. 자공이 자신이 당했던 일을 노나라에 돌아가서 공자에게 이실직고 합니다. 공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위포자가 혼돈씨(混沌氏)의 술법을 빌어서 수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노장(老莊)류의 학풍을 지닌 이라는 거였겠지요. 그러면서 위포자가 그런 방식으로 자공을 대한 태도를 평가합니다. ①그 사람은 혼돈씨의 술법을 잘못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는 거지. 자기의 내면을 잘 다스리고는 있지만 외면을 다스리지는 못해. 자네를 놀래키는 걸 보면 그는 아직 하수야. … 어쨌든 우리가 혼돈씨의 술법을 어찌 이해하겠느냐(안동림 역주). ②그 사람은 혼돈씨의 술법을 빌어 수양하고 있는 사람으로 절대적인 도(道) 하나만 알 뿐 상대적인 것들은 모른다. 그 속만 다스릴 뿐 그 밖은 다스리지 않는다. 너는 놀랄 필요가 없다. … 우리가 어찌 혼돈씨의 술법을 알 수 있겠느냐(조관희 역해). 


공자의 평가가 위포자를 무시하는 것이든 존중하는 것이든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평가든 장자가(장자의 후학들이) 강조하는 ‘혼돈씨의 술법’이 폄하되지는 않습니다. 외물(外物)에 영향 받지 않는 자기 자신의 확립이 중요한 것이라는 취지에는 그 어떤 해석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살아 보니 위포자의 말이 꼭 과장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굳이 수양(修養)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불편이 따르더라도 기계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게 여러 모로 유익할 것 같습니다. 우선 차 타는 시간과 컴퓨터 만지는 시간을 좀 줄여야 될 것 같습니다(페이스북에서 노는 시간도 확 줄여야 되겠지요). 어쨌든, 위포자의 밭일에 해당되는 저대로의 일거리도 조만간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책상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이런 글이나 쓰는 신세에서 조만간 좀 벗어나야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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