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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12. 2019

장생술(長生術)

운동의 중요성

장생술(長生術)    

 

어디선가 호흡(氣의 순환)을 통한 양생법(養生法)이 인간의 생명 연장, ‘장수(長壽)의 기술’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심 조금 의외였습니다. (기분) 좋게 살다 가는 데는 그것 이상의 수련이 없지만, 그것이 수명을 연장하는 한 방책이 된다는 것은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호흡에 일가견이 있던 분들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는 경우도 종종 보는 편이었습니다. 호흡 공부를 하는(했던)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이상의 몸 공부가 없는 것 같은데 왜 수명을 늘이는데 큰 효험이 없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옛날부터 도가적(道家的)의 수련에서는 장생술과 건신술이 중시됩니다. 거의 지고무상의 불로장생과 우화등선의 방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듯합니다. 궁금증이 돌아서 책에서 그 내용을 한 번 찾아봤습니다.

     

... 내단(內丹)의 요점은 ‘기를 보양하고 고요함을 지키는 양기수정(養氣守靜)에 있다. 『태평어람』에서 ’양생의 방법은 몸을 편안히 하고 기를 보양하며, 좋아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곧 <원기(元氣)>이며, 이런 원기는 우주 천지만물이 변화하고 살아가는 근원일 분만 아니라 인간의 근원이기도 하며, 또한 원기는 음양이기의 교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음양이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음양이기를 상실하면 죽게 되며, 음양이기가 조화되지 않거나 혹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질병을 유발한다. 그러면 <기>는 어떻게 보양될 수 있는가? 

도교에서는 기를 보양하려면 우선 정서의 조화와 안정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감정의 동요, 성욕의 충동, 지나친 피로 등은 모두 이러한 조화와 안정을 파괴하며 심리적 불안정을 초래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치게 힘들여 노동하는 것이나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것,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노여워하는 것, 지나치게 음락에 빠지는 것 등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멋대로 성색(聲色, 노래와 여색)에 탐닉하는 것, 신경을 많이 써서 부귀를 도모하는 것, 가슴 속에 좌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조급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랠 수 없는 것, 예도에 구속되지 않는 것, 식생활에 절제가 없는 것’ 등은 모두 ‘일찍 죽게 하거나 몸을 상하게 하는 화근’이라고 보고 회피했다. <중략>

사람의 일기(一氣)가 왕래하는 것이 호흡이다. 무릇 한 번 내쉬고 한 번 들이마시는 것을 한 번 숨 쉰다 하는데, 한 번 숨쉬는 동안에도 음양이 구별된다.[영보내상단지(靈寶內象丹旨)]

물고기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어 물을 변화시킬 수 있기에 죽지 않는다. 사람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기를 변화시킬 수 있으면 곧 장생할 수 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은 매일 오곡, 고기, 과실, 채소 등을 먹어서 목숨을 보양하는 것만을 알 뿐, 오곡, 고기, 과실, 채소 등이 형체를 가진 사물을 죽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릇 무(無)가 아닌 유(有)인 까닭으로 형체가 있는 것은 음에 속하니, 곧 토지의 정기이며, 오로지 원기만이 양에 속하는 것이다.[太上洞玄靈寶天尊說救苦妙經]

이렇게 내뱉고 들이쉼(吐納)을 중시함과 아울러 행하면서 <존상사신(存想思神)>을 할 것을 강조하고, 이를 수련의 주요과목으로 삼았다. 소위 <존상사신>이란 것은, 곧 고요하게 내쉬고 들이쉴 때 마음의 눈으로 신비한 정경을 생각하고 그려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급칠첨(雲笈七籤)』 권54에서 소개한 것을 보면, ‘자신의 몸에 한 줄기 붉은 기운이 치솟아 오르는데 모양이 계란 같은 것이 눈으로부터 튀어나와 온 몸을 휘돌아 감싸는 것을 상상하면, 자신이 마치 활활 타오르는 한 덩이 붉은 숯 같다.’는 대목이 있다. <후략> [葛兆光(沈揆昊 옮김), 『道敎와 中國文化』]     


저도 소싯적에 몇 차례 호흡 공부에 입문하려는 시도를 해 보긴 했습니다만 근본 천학비재라 문안에 들지를 못했습니다. 경전에서 금하는 ‘제멋대로 성색(聲色, 노래와 여색)에 탐닉하는 것, 신경을 많이 써서 부귀를 도모하는 것, 가슴 속에 좌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조급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랠 수 없는 것, 예도에 구속되지 않는 것, 식생활에 절제가 없는 것’이 바로 저의 생활상 그 자체였기 때문에 선한 의지가 순간 발동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그것을 유지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제 안의 공격성을 좀 무디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짧은 시간에 숨 가쁘게 움직여 땀을 많이 흘릴 수 있는 운동(검도 수련)이었습니다. 다행히 저의 성벽과 환경과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사표로 삼는 선배 검객들도 대체적으로 장수를 하시는 편이라 이 선택에 아직 후회는 없습니다. 저도 힘닿는 대로 젊은이들을 좀 가르치면서 늘 ‘움직이는 생활’을 가급적 오래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이 모두 다 8,90을 산다는데 저 혼자 그 아랫줄에 서서 먼저 간다는 것도 좀 섭섭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늘 움직여 땀을 내면서 성색에 탐닉하지 않고, 부귀를 도모하지 않고, 젊은 시절의 좌절심과 조급심을 잊고, 술이든 밥이든 먹는 일에 욕심내지 않고, 꾸준하게 살다 보면 평균은 가지 않겠나 한 번 소망해 봅니다.

<2013. 6. 12.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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