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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0. 2019

카인의 후예

데미안

카인의 후예  

   

저는 친구 많은 이를 존경합니다. 그만큼 많이 베풀며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베풀수록 많이 생깁니다. 그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자기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나눌 것이 없는 자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마음을 나누거나 물질을 나누거나, 나눌 수 있는 자들만이 친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친구도 마찬가집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와 이드라는 두 친구를 잘 사귀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들에게 베풀지 않고 원만한 교우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인생이 내내 씁쓸한 맛일 거라고 프로이트는 강조합니다. 초자아라는 형 같은 친구의 말(명령)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드라는 철없는 동생 같은 친구도 잘 어르고 달래면서 화목하게 지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살 만큼 살아보니 프로이트가 헛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막스 데미안을 만나는 장면을 소개하겠습니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악동에게 끔찍하게 시달리며, ‘집안의 정돈된 평화의 한가운데서 소심하게, 그리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고 있었던’(35쪽) 싱클레어에게는 우연히 찾아온 데미안과의 만남이 인생 역전의 한 기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대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대목은 싱클레어의 경험을 빌려, 작가가 우리 모두에게 자기 안의 ‘형 같은 친구’를 한 번 만나 볼 것을 권하는 장면이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는 그 얼마 전에 학생이 한 명 새로 들어왔다. 우리 도시로 이사온 어느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로, 옷소매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학년 높았으며 나이도 몇 살 더 들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처럼 나도 그를 주목했다. 이 이상한 학생은 보기보다 훨씬 나이가 든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어른처럼, 아니 그냥 어른이라기보다는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우리 유치한 소년들 사이를 오갔다. 인기 있지는 않았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질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들에게 맞서는 그의 자신감 있고 단호한 어조가 다른 학생들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중략>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거부했는데도 그애는 거의 화난 기색도 없었다.

「글쎄」 하고 그애는 얼버무렸다. 「네가 잘 생각해 볼 테지. 너네 누나와 알고 지내게 되었으면 한단 말이야. 한 번쯤 알고 지내는 거야 되겠지. 그냥 누나와 같이 산보하러 가. 그럼 내가 낄 테니까. 내일 휘파람으로 부를게. 그때 다시 한 번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애가 떠나고 나서 갑자기 그애가 원하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나는 아직 완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소년들과 소녀들이, 조금 나이가 들면 그 어떤 비밀에 찬, 금지된 상스러운 일들을 함께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그러니까 아주 갑자기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가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이 즉시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 크로머가 어떻게 내게 복수할지,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엄두조차 안 났다. 나에게는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절망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텅 빈 광장을 건너갔다. 새로운 고통, 새로운 노예상태였다!     

그때 상쾌하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놀라 빨리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오더니 한 손이 뒤에서 부드럽게 나를 잡았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잡힌 척했다.

「형이었구나?」 나는 불안정하게 말했다. 「깜짝 놀랐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때보다 더 어른스럽고 압도적이며 꿰뚫어보는 사람의 시선인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거 유감인데」 그가 특유의 공손하면서도 아주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들어봐, 누가 놀라게 한다고 그렇게 놀라서는 안 돼」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뭐」

「그런 것 같지. 하지만 알아둬. 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어던 사람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 덜면, 그 사람은 생각을 해보기 시작하는 거야. 이상하게 생각이 되는 거야, 궁금해지지. 그 사람은 생각하게 돼, 네가 이상하게도 잘 놀란다고. 그리고는 계속 생각하지. 사람이 저러는 건 바로 겁이 날 때인데라구. 겁쟁이들은 언제나 불안하지. 하지만 내 생각으로 너는 원래 겁쟁이가 아니야. 아, 물론 영웅도 아니지. 지금 넌 뭔가 겁나는 일이 있어. 겁나는 사람도 있구. 그런데 그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래, 사람을 무서워해서는 결코 안 될 거야. 날 무서워하진 않지? 아니면 무섭니?」

「오 아니야, 전혀 안 무서워」 

「그럴테지. 하지만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난 몰라……. 날 내버려둬, 나한테서 뭘 바라는 거야?」 

그는 나와 나란히 걸었고 – 나는 더 빨리 걸었다. 도망칠 생각을 하며 – 곁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번 가정을 해봐」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내가 널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야. 아무튼 나한테는 겁을 낼 필요가 없어. 너하고 실험을 한 번 해보고 싶어, 재미있기도 하고 네가 거기서 꽤 쓸모 있는 걸 배울 수도 있어. 한 번 주의해 들어봐! 나는 이따금씩 독심술(讀心術)이라고 부르는 기술을 써보곤 해. 무슨 나쁜 마법이 거기 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면 아주 이상해 보이지. 그걸로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할 수 있어. 자아, 우리 한 번 시험해 보자.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해, 혹은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는데 이제 네 마음 속 모습이 어떤지를 밝혀내 보고 싶은 거야. 그러기 위해 나는 이미 시작했어. 내가 널 놀라게 했지. 넌 그러니까 잘 놀라는 거야. 즉 넌 두려운 일이나 사람이 있는 거야. 그게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예를 들면 뭔가 나쁜 일을 했어봐, 그리고 상대방이 그걸 알고. 그럴 때 그가 너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는 거야. 알아들었니? 이제 분명하지, 안 그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진지하고 영리했다. 그러면서도 또 너그러웠지만, 온갖 정다움이 깃들여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엄격했다. 정의나 혹은 뭔가 그 비슷한 것이 거기에는 있었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마술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카인」, 51~52쪽]     


데미안은 사탄의 작은 병사인 악동(惡童) 프란츠 크로머를 퇴치합니다. 싱클레어는 그 은사(恩赦, 恩賜)를 통해 자기 안의 비겁과 비굴을 똑바로 쳐다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고통은 결국 자기 안의 죄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이 만든 ‘카인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집니다.     

사족 한 마디. 크로머와 싱클레어, 간악한 악동과 겁 많은 순둥이 사이의 ‘약탈적 관계’가 순진한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약탈과 협박의 관계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그런 악이 자행되는 것을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본 적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데미안의 독심술도, 데미안의 사람을 압도하는 기품도, 데미안의 신비스런 문제해결력도 없었습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제겐 『데미안』을 읽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겁 많은 싱클레어의 신세는 겨우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데미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비겁과 비굴은 죄를 모면하고자 할 때 힘을 얻습니다. 두려움은 죄를 붙들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이미 나락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죄’에 매여 있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카인’, 내 안의 사탄 친구입니다.

<2012. 7. 10.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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