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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09. 2019

세모와 네모

두 세계

세모와 네모두 세계     


젊어서 글쓰는 재미를 몸에 붙였습니다. 보통은 다방 같은 곳에서 짧게 짧게 떠오르는 착상을 그때그때 적어두었다가 집에 와서 이리저리 이어 붙여 보곤 했습니다. 다방 글쓰기는 저희 시절의 한 풍속이었습니다. 제가 드나들던 한 고전 음악 다방에서는 훗날 10여명의 문사(文士)가 한꺼번에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간혹 대여섯 시간, 앉은 자리에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세모와 네모’라는 ‘어린왕자’ 아류의 유치한 단편도 처음 한 편 써봤습니다. 아쉽게도 '세모와 네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손바닥만한 음악신청 용지에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흘려쓴 것인데 그 도톰한 종이뭉치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합니다. 한 아이 속에서 두 인격이 공존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설로 인정받은 제 최초의 작품인 셈인데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가져간 모양입니다(자세한 사정은 약합니다).     

 

『어린왕자』(셍텍쥐페리, 1943)나 『데미안』(헤르만 헤세, 1919)이 어른들의 읽을거리로 더욱 홍보되어야 할 것 같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이 들어, 십대 때든 이십대 때든, 그때 그 시절의 감흥을 다시 느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취지로 이 소설들을 손에 닿는 대로 읽다 보면 ‘어,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하고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몇 장 넘길 필요도 없이, 인생살이의 요점과 핵심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대목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명작이 그냥 명작이 되는 게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그 대목을 읽은 기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직 그런 감동까지 챙길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읽었던 때문입니다.     

간략하게 요약된 헤르만 헤세의 전기적 자료들을 보면서 저는 ‘두 개의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작가로서 그가 경유한 생의 두 차원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입니다. 그가 융학파적인 인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마흔 이후의 일이었으며 그것이 소설작품으로 드러난 결과가 『데미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통해 유명 작가가 되었습니다. ‘유명 작가’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관철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가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만능키(천국의 열쇠)’를 얻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작가에게는 그것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습니다. 주옥과도 같은 명작들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열 살짜리 주인공(싱클레어)이 세계의 이중성에 눈뜨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를테면 ‘높은 물과 낮은 물’이 공존하는 그 오묘한 인간 세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부터 이 소설은 출발합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거칠고도 잔인한 그 모든 일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서 있었고 경찰 끄나풀들과 부랑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아내를 패고, 저녁때면 젊은 여자들의 무리가 뒤엉켜 공장에서 꾸역꾸역 나왔다. 늙은 여자들은 누군가에게 요술을 걸거나 병이 나도록 할 수 있었다. 숲에는 도둑떼가 살고 있었다. 방화자들은 뒤쫓는 경관에게 잡혔다. 어디서나,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 집안에서만 빼고는 어디서나 이 격렬한 두 번째 세계가 솟아나오고 향기를 뿜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았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 의무와 거리낌 없는 양심, 용서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 모든 다른 것들, 소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이 존재하며 그래도 그런 것들로부터 한 걸음이면 어머니한테로 피신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두 세계」, 11~12쪽]     


열 살짜리 주인공 싱클레어는 성(性)과 폭력, 이율배반과 공격성이 유예된 양심과 도덕의 세계에 살면서 자신을 둘러싼 그 ‘격렬한 두 번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으로부터의 위협을 차단시켜주는 ‘어머니’라는 보호막의 존재에 대해서도 감사히 여깁니다. 싱클레어만할 때 저에게도 그런 ‘두 번째 세계’가 한 번 자신의 모습을 슬쩍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두 번째 세계’의 경험은 마치 한 편의 무협소설처럼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지금껏 잊지 못하는 최초로 경험한 ‘커다란 하나의 에로스’였던 것 같습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그때 저희집에 무거운 짐자전차(자전거)가 한 대 있었습니다. 짐을 싣고 여기저기 물건을 실어나르는 일을 도맡아 하던 무쇠(같은) 자전거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자전차를 자식만큼이나 애지중지했습니다. 저는 일이 없을 때 그 자전차를 빌려 타고 집 주변을 종횡무진 누볐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누비다 보니 사고도 잦았습니다. 동네 아이들 중 그 자전차 바퀴에 발등 한 번 안 눌린 아이는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한 번은 큰길로 나갔다가 버스와도 정면으로 부딪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도 자전차도 무사했습니다(속수무책으로 달려오는 버스와 부딪치는 그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기억에 뚜렷합니다). 어쨌든 그 짐자전차는 저희집의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짐자전차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분명히 제가 끌고나간 기억은 있는데 끌고 들어온 기억은 없었습니다. 노느라 바빠서 어딘가 세워놓고 그냥 집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이들과 구슬치기 하던 장소를 포함해서 버스가 다니는 대로변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저의 애마는 종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저희 집 단골손님이었던 양아치대장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수하에 넝마부대원 4,50명을 거느리고 있던 ‘동래고보 출신’(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변상태 아저씨’였습니다. 저를 보면 늘 ‘이찌방?’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시던 분입니다. ‘공부 잘 하느냐?’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 아저씨 말씀이 지금 이 시간쯤이면 그 짐자전차는 팔달교 아래 어딘가에 가 있을 거라는 거였습니다. 팔달교는 그 전 해에 학교에서 봄소풍을 다녀와서 저도 알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을 가로지르면서 도시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 저희 집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반나절쯤 뒤에 저의 애마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마 소주 몇 병이 품삯으로 지불되었을 겁니다. 주류 도매업을 하던 아버지는 가게 안에 선술집 형태의 직매장도 열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두 번째의 세계’는 그렇게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고나서도 자주 마주치고 있는, 그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두 번째의 세계’들과도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근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따뜻한 시간의 느낌(싱클레어는 ‘향기를 뿜었다’라고 표현하는)이 여전히 저의 마음을 훈훈히 덥히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때 본 것이 사회의 밑바닥을 흐르는 ‘낮은 물’이 아니라 인정이 흘러넘치는 ‘높은 물’이 아니었던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 어느 순간부터 ‘두 세계’를 보게 됩니다(물론 그것을 보지 않고 수도자의 길로 맞바로 들어서는 이도 있겠습니다만). 감탄이든 경이든 혼돈이든 공포든, 우리는 <두 세계>의 분열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싱클레어처럼 ‘높은 물’에서 살면서 ‘낮은 물’을 겪을 수도 있고, 저같이 ‘높은 물’을 채 겪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낮은 물’을 보고 경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세계’가 적절한 균형감각 위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지나친 분열을 강요한 나머지 청춘의 삶에 큰 상처를 남기게 한 경우를 몇 건 알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높은 물’에 속하고 있음을 자처하면서 실상은 ‘그 두 번째 세계’를 진짜 세계로 알고 사는 이들도 자주 봅니다. 그들은 도덕이나 양심, 희생이나 박애는 그저 하나의 위장술이라고 여깁니다. 마지막으로 싱클레어가 그 ‘두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조금만 참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 옆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주한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심지어 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금지된 세계 안이었다. 그리고 밝음 속으로의 귀환은 – 그것이 제아무리 필연적이고 제아무리 선하더라도 – 덜 아름다운 것, 보다 지루한 것, 보다 황량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두 세계」, 12~13쪽]     


사족 한 마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는 게 있답니다.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라고 합니다. 인질이 아니더라도 일부 매 맞는 아내, 학대받는 아이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폭력과 야만을 스스로 받아들여 자신을 망친 것들의 앞잡이가 됩니다. 그러나, 그쪽은 엄연히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싱클레어가 말하고 있듯이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세계’라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합니다. 가책과 불안에 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 ‘첫 번째 세계’를 뒤엎는 것은 누가 뭐래도 못나고 약하고 악한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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