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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08. 2019

살아서 돌아오는 주인공

이야기판의 흥망성쇠

살아서 돌아오는 주인공

     

진정한 이야기에는 어쩔 수 없이 역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역사의 기록이 되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미래’를 내포합니다. 과거는 늘 미래를 위해 존재합니다. 과거의 이야기(역사적 내용)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속성을 두고 보더라도 이야기는 늘 미래지향적입니다. 늘 변화를 몸에 안고 살아갑니다. 이야기의 변화는 언제나 시대를 앞서 가기 때문에 ‘이야기의 (변화되어지는)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공동체)의 삶이 어떻게 변화할 지를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일본은 없다’(책)와 ‘서편제’(영화)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이야기가 동시에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두 편의 이야기가 ‘오래되고 묵은 (우리) 것’에 대한 인정(귀소) 욕구를 대변하는 것임을 아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야기에서 그런 것이 노출되면 당연히 정치판의 주인공이 누구가 될 것인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래 되고 묵은’ 정치인이 선택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첫사랑 코드가 갑자기 이야기판을 휩쓴다고 한다면 ‘첫사랑’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정치적 첫사랑과 혈연 관계가 있는 이가 정치판의 총아가 될 공산이 큽니다. 어쨌든 이야기판을 통한 ‘정치 예측’은 재미 이상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그런 관심의 연장선에서 아동문학의 한 패턴이 미래 예측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아동 문학의 기본 패턴은 ‘회귀적(回歸的) 여행’입니다. 아이들 이야기의 기본 플롯은 일반적으로 <집―떠남―모험―집>이라는 공식을 보여줍니다. 이 패턴은 꼭 드러낸 모험(탐색)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광범위하게 아이들 이야기에 수용됩니다. 거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크게 보면 아이들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시련을 겪고 살아 돌아오는 주인공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흔히 발견됩니다. <분리―시련― 귀환>이 모든 이야기의 기본틀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이 패턴이 인류의 어떤 근원적인 소망(원형적 모티프)을 반영할 것이라는 추측도 그래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르는(안 보는) 사이에(격리) 크게 변한 이가(시련 극복)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심성 같은 것(영웅대망심리)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위험과 시련 속에서 모험의 세계를 일주하고 안전한 ‘집’으로 되돌아오는 패턴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른바 근대문학, 그 중에서도 리얼리즘 소설입니다. 리얼리즘 입장에서 보면 그런 패턴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귀환의 약속’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도 없게 하고 진정 신나는 모험을 그려내기도 어렵게 하는 구속일 뿐입니다. 그들은 종래의 회귀적 패턴(분리-시련-귀환) 대신에, 한 번 출발하면 출발지와는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는 신개지(新開地)에서의 새로운 삶을 선호합니다. 철통같았던 아동문학의 아성에도 그러한 변화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아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그 때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아동 문학에서는 ‘주인공의 죽음’이 행복한 결말인지 불행한 결말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죽음은 선과 악이 그렇듯이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한 작가가 자신의 주인공을(우리 곁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고) ‘다른 세계에 남겨둔 채’ 이야기를 끝낸다는 방식이 당시로는 굉장히 낯선 코드였음이 분명했습니다. 리얼리즘 소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음에도 그들 신개지 아동문학은 일종의 퀴어적 존재였을 뿐입니다.   

  

리얼리즘 소설은 근대의 총아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근대의 맹아를 싹틔우며 세계를 변화시킬 때 등장한, 새로운 이야기판입니다. ‘현실적 이야기들’은 숫자에 밝은 부르조아들의 세계관을 크게 만족시킵니다. 당연히 ‘불패의 진리’가 됩니다. 그들이 즐기던 신개지 이야기들 역시 종래의 것들보다 훨씬 더 고급지고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는 그럴 만했습니다. 세계가 더 밝은 쪽으로 나아갈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조는 무너지고 민권은 날로 신장되었습니다.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들도 전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나는(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주인공들을 배웅했습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가진 어린이 책들은 아이들의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력을 구속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열린 결말이 예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조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들의 자본주의가 다시 그들 주인들의 삶을 지배하면서 상황은 예기치 않게 암전(暗轉)합니다. 세계는 더 밝은 쪽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는 각성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은 ‘어둠의 자식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실망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 옛날 굶주린 민초들이 기아와 살육의 공포 속에서, 희망 없는 삶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내던 끔찍하고 야비한 잔혹 동화(민담)들이 다시 횡행하기 시작했습니다(리얼리즘 소설의 붕괴와 아이들이 즐겨 지어내는 패러디 동화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상은, 마리아 니콜라예바(김서정), 『용의 아이들』, 124쪽 이하의 내용을 참조하되 제 글의 취지에 맞게 일부 수정, 차용한 것입니다)     


현실은 어떤지 몰라도, 이야기판에서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세상이 밝아진다고 느끼면, 그래서 주인공 혼자서도 늠름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면 독자들은 신개지 문학을 선호합니다. 리얼리즘의 검증을 달게 수용합니다. 주인공에게 다가올 미래는 시련이 아니라 모험으로 간주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더 어두워지고 있다고 느끼면, 그래서 특별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때는 독자들이 주인공이 살아서 돌아오는 회귀적 서사구조를 선택합니다. 어두운 세상에는 반드시 영웅이 필요한데, 속악(俗惡)에 의해 주인공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나서서 주인공을 구해 와야 합니다. 정치판에서도 그런 ‘살아 돌아오는 주인공’이 각광을 받게 됩니다. 지금 이야기판의 주인공들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 둘러보실까요? 그러면 다음 선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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