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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07. 2019

예술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아는 놈과 모르는 놈

예술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언젠가 철없는 아들이 공연히(공공연하게 대중 앞에서) 예술가를 자처하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매일같이 빈둥거리며 집안에 쳐 박혀 있는 아버지를 한심하게 여기던 차였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아버지 옆에 털썩하고 같이 누웠습니다. 
"아버지,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누가 결정해요?" 
느닷없는 질문에 아버지는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걸 아는 놈들이 결정하지." 
아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아버지가 답했습니다. 
"당근,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는 놈들이지." 
아버지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아들이 또 물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인정하는데요?" 
또 아버지가 답했습니다. 
"그거야 물론 그걸 아는 놈들이지." 
질문을 하는 아들이나 대답을 하는 아버지나 만족스럽지 않은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여전히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들이 또 물었습니다. 
"자기는 예술가라고 우기지만 남들이 아니라고 하면요?" 
아버지가 심드렁하게, 그러나 철없는 아들의 물음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아닌 거지." 
그러자, 아들이 픽하며 콧방귀를 꼈습니다. 무슨 명확한 기준도 없이 예술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된다면 예술이란 게 결국 일시적인 유행이거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기도 했고요. 그 복합적인 표정에는 별 내용도 없이 공연히 예술가연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놈의 표정을 흘낏 살피면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본디 모르는 놈들은 모르는 법이다. 이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아는 놈과 모르는 놈. 돈을 아는 놈과 돈을 모르는 놈, 권력을 아는 놈과 권력을 모르는 놈, 신을 아는 놈과 신을 모르는 놈, 사랑을 아는 놈과 사랑을 모르는 놈(이 대목에서 아들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습니다. 아마 자기가 아는 사랑이 있었겠죠?), 예술을 아는 놈과 예술을 모르는 놈, 그렇게 나뉜다. 너도 알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르는 놈은 끝까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이미 오래전에 그걸 강조했지만, 그걸 아는 게 중요하다. 자기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을. 무릇 인간이라는 존재는 알기 전까지는 아무리 알고 싶어도, 이를테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건 모르는 법이다. 특히 예술처럼 ‘경지(境地)’라는 게 있는 종목에서는 그런 ‘끝까지 모르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경지에 속하는 것이다. 경지에 든 놈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닌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술이다. 경지를 모르는 놈들이 백 놈이 모여서 한 목소리로 떠들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상.”
갑자기 아버지의 장광설이 무언가 엄연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아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아마 아버지의 언동(言動)에서 무엇인가 아는 놈의 낌새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더 이상 모르는 놈 취급을 받기가 싫었는지, 순순히 순한 표정으로 물러났습니다. 모르는 아들에게 못한 말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아들에게는 아들의 세상이,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세상이 있습니다. 세상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아버지의 경지를 모릅니다. 누구나 스스로 아버지가 됨으로써 ‘아버지의 세상’도 가집니다. 자기가 모른다고 세상에 있는 것이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예술을 모른다고, 문학을 모른다고, 예술이 없어지고 문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공유적 인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매하고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여겨져도 그 ‘공유적 인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세상은 돌아갑니다. 인간 사회에서 그 ‘공유적 인식’이 행사하는 힘은 지대하기 그지없습니다. 언어가 대표적입니다. 언어의 힘은 바로 그 ‘공유적 인식’에서 나옵니다. 그것에 기대어 언어는 사물을 만들어냅니다. 언어의 의미 생성, 예술론적 인식, 심미성의 기준 같은 것들은 반드시 그 ‘공유적 인식’을 바탕으로 생성됩니다. 예술가는 언제나 그 ‘공유적 인식’에 고삐가 매여있지만, 또한 그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이이기도 합니다. 어디서든 아방가르드는 그래서 필요합니다. 어쨌든, 그 ‘공유적 인식’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우정 소홀히 하다 보면 ‘얼치기’가 됩니다. 나쁘게 되면 사기꾼이 되고요. 위에서 적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반석(盤石) 같은 진리’들이 사실은 그러한 공유적 인식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얼치기 과학자들은 언어를 둘로 나눕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눕니다. 이른바 증명 가능한 ‘과학의 언어’만이 진리를 보지(保持)한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문학의 언어’는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저 ‘황당한 소감과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비과학적 언어’들을 폄하합니다. 그것들만 없애면 세상이 훨씬 명징해지고 조용해질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얼치기 경제(경영)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에게는 ‘이익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얼치기 정치학자, 얼치기 법학자, 얼치기 교육학자, 얼치기 철학자들에게도 그런 ‘자신만의 진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문학의 언어’가 그들이 쌓아온 진리의 탑(맹목의 바벨탑?)을 허물어뜨릴까봐 두려워합니다. 얼치기 수준일 때일수록 그런 ‘두려움에서 비롯된 공격성’이 우심(尤甚)합니다. 
<2012. 7. 7.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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