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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2. 2019

코드와 맥락 혹은 오해와 편견

화이부동,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2

2) 코드와 맥락 혹은 오해와 편견     


맥락(脈絡, context)이라는 말을 연암이 말한 ‘결’이 대신하거나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비슷한 내포를 지니고 있는 말이라는 건 확실하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글의 ‘결’은 글을 쓰는 이의 기상(氣像)이나 윤리 감각, 인간으로서의 품성, 사회적 실천 의지 등등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맥락이라는 말에는 그런 글 쓰는 이의 내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충분치 않다. 그런 요소보다는 글이 탄생하는 상황이나 환경, 글의 표층구조 아래에 놓여 있는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큰 개념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글에는 ‘결’이 있어야 한다는 연암의 말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맥락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된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 로만 야콥슨의 의사소통의 도식부터 일별해 보자.     

                                  맥락(context)

                                  접촉(contact)

화자(speaker)------------메시지(message) -------------청자(hearer)

                                  코드(cord)        

야콥슨은 의사가 전달되는 데에는(의미가 재생산 되는 데에는) 여섯 가지 정도의 변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자, 청자, 맥락, 접촉(접속), 메시지, 코드(문법)가 그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맥락(환경)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말한 맥락이라는 개념은 사실 나머지 다섯 가지 요소들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었다. 좁은 개념으로는 발화가 이루어지는 ‘사회 역사적 환경’이지만 그 개념을 조금 넓히면 발화가 이루어지는 모든 환경이 다 맥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특정의 화자와 청자, 특정의 접촉과 코드가 사용되는 것 자체가 다 맥락적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맥락이라는 개념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다. 만약 ‘화자 맥락’, ‘청자 맥락’이라는 말을 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야콥슨이 말한 맥락 개념을 정 반대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맥락을 접촉, 메시지, 코드 등과 일렬로 나열하지 않고 일렬로 나열되면서 동시에 나머지 다섯 요소들을 크게 감싸고 있는 개념으로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야콥슨이 제시한 의사소통의 도식(여섯 변수를 특정한)은 편의상 만든 그림이기 때문에 이해만 하고 그 그림에 따른 제3의 ‘독서의 이론’이나 ‘작문의 이론’을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화자와 청자는 각각의 고유한(변화막측하고 예단하기 어려운) 심리적 주체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에는 접촉의 방식이나 공유하는 코드(문법체계), 그리고 두 주체의 사회역사적 환경에 의한 변수 이외에도 극도로 불투명한 심리적 요인이 이미 개입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불투명한 내적 요소들의 상호텍스트성은 우리의 언어가 포착해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자 중심(심리비평), 청자 중심(수용미학), 메시지 중심(형식주의 비평), 코드 중심(신비평), 맥락 중심(사회역사적 비평), 접촉 중심(소통 미학) 등으로 나누어서 미학적 소견(소위 비평이론)이나 교육적 소견(주로 읽기, 쓰기에 대한)을 정립하는 것은 사실상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을 쓸 때 가장, 혹은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지만 맥락 하나뿐이다. 당연히 이때의 ‘맥락’은 각 요소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글 밖의 맥락과 글 안의 맥락을 잘 궁구(窮究)해서 내 글쓰기에 잘 활용해야 한다. 글쓰기에 사용되는 각 소재들의 불화를 다독여서 그것들이 협화(協和)할 수 있도록 묶어주는 안팎의 맥락을 잘 찾아내어서 독자의 불신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설득의 논리를 개발하는 게 글 쓰는 자의 급선무다. 그 다음 적절한 비유(은유와 환유, 특히 환유)를 제시하여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면 독자를 완벽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거기다가 주제적 측면에서 대의와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독자가 내 편이 되어서 함께 싸움터에 나갈 수 있도록 독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확립)-논리(개발)-수사(공감)-명분(독려)’의 예시가 될 수 있는 글을 한 편 살펴보도록 하자. 한 종교 서적에 대한 짧은 독후감이다.


원수와 이웃행동하는 예수     

기독교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랑’보다 ‘원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제게는 ‘원수’라 할 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나이에 스스로 만든 ‘원수’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미운 놈’ 한두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동네 골목에서 돈 자랑하는 심술쟁이 친구가 한 명, 학교에서 힘자랑하며 공연히 아이들을 괴롭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듣고는 내 ‘원수’가 누군지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도마렛(서라)!’을 외치는 왜놈 순사들을 꼽았고(당시 즐겨 보던 만화에 그런 장면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공산당과 김일성 도당을 꼽았고(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그 다음엔 중공군, 그 다음엔 도둑놈(당시에는 도둑맞는 일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렇게 ‘원수’들을 정해 나갔습니다. 모두 저와는 직접적인 원한이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 말이 진정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 즉, 제 개인적인 ‘원수’가 생기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랜 뒤였습니다. 10년에 한 명 정도?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원수들은 멋대로 저를 괴롭히다가 돌연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고(멀리 새 직장을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병들어 죽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끈끈이주걱처럼 제 곁에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감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드니 다 희미해졌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과연 제게 ‘용서할 수 없는 자’가 존재하는지 저 자신도 궁금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혹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애초에 듣지 못했다면 이런 상황이 도래하지도 않았을 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도 합니다. 그 반대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런 말을 애당초 들은 일이 없었다면  ‘원수’ 자체가 안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라는 엉뚱한 생각도 간혹 들기도 합니다. 

그 비슷한 일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웃’이라는 말이 그렇게 ‘살가운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는 ‘이웃’은 결코 남이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토플러의 말을 빌려서 “네 이웃이 곧 세계다.”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습니다만(사고는 글로벌(global)하게 하고 실천은 지역적(local)으로 하자고 어느 글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기실 토플러의 그런 주장도 그 기원을 찾아가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두 말씀 다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씀인데 이상하게도 삐딱하게 그 목적어들에 더 꽂히는 제 심보가 좀 얄밉습니다. 아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한 탓이 아닌가 여깁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2% 부족하게 타고난 것 같습니다.  

   

...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라는 루터 식 고뇌를 예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삶으로 인해 내 이웃의 삶이, 특히 가난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라고 예수는 고뇌한 것 같다. 이웃 종교인 불교나 도교 역시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러나 니체에게 인간의 약함과 위선일 뿐이다. 독일 작가 하이네(Heine)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시려면, 내 원수 예닐곱을 나무에 못 박는 기쁨을 내게 주시기를… 인간은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이 나무에 못 박히기 전에는 안 된다.” 하이네의 심정이 우리 심정이리라. 원수 사랑이 그리 쉬울까. 원수를 사랑함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서는 행동이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한 사람은 이웃 개념을 확장하기 어렵다. 하느님 사랑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성 노동자 여성도 세리도 박해하는 사람도 모두 이웃이 된다. 원수 사랑이 어렵다면 우선 이웃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메디치, 2014]     

 

종교는 인생의 필수 모티프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을 자유 모티프로 여기는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교를 믿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이유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랑’은 ‘자기만 사랑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면 이웃사랑도 원수 사랑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종교를 싫어하는 까닭은 사실은 종교 그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종교를 믿는(운영하는) 사람들의 못나고 못된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디 자기 사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데 불가능한 실천을 강조하면서 인간에게 자기를 기만할 기회와 빌미를 종교가 주는 것에 불만이 많은 것이지요. 정작 싸워서 깨부숴야 하는 적을 앞에 두고도 엉뚱한 논리를 앞세워 도피하게 한다고 그들은 종교를 나무랍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은 ‘아편’이 맞습니다. 공동체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보기에는 곱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독버섯과 같은 것이겠고요. 기복신앙에 치우쳐서 죄의식 없는 ‘바람(願望)’과 사랑 없는 ‘기원(祈願)’만을 일삼는 일부 신앙 공동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마비된 이성’에 동정심마저 생깁니다. 그러나 제 삶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곤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그런 ‘가난한 마음’을 마냥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저라고 떳떳한 신앙인이라고(이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에도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 있을 때만 유독 신심(信心)이 돋았습니다. 몸이 지독하게 아플 때, 아니면 모함을 받거나 사기를 당해서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제 이성을 마비시키고 눈물을 돋게 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그때그때 조금씩 반성적인 태도로 독후감을 써 본다는 것이 도를 넘겨서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보지 마시고, 제 글도 그저 ‘못난 이웃의 하소연’ 정도로 여기시고 부디 내치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참, 이 글을 쓰면서 보는 오늘 <한국인의 밥상>은 사람을 많이 울리네요. 거제와 마산, 해녀 어머니와 해녀 딸,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머니의 바다’와 미더덕 미역국 이야깁니다. 저에게도 그쪽 바다가 어머니의 바다였던 관계로 유독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이제 마산의 오동동도 나오네요. 옛날 제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신세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고개 숙인 길가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 있군요.


예시문의 필자는 “사랑하라,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려고 애써 기독교라는 종교를 우회한다. 무언가 권위 있는 ‘말씀’을 가져다 자기 속을 얹어야 독자들에게 좀 더 쉬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시(例示)’가 될 수 있는 것은 주지(主旨, 필자가 하고 싶은 말)보다 권위가 있거나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성경 말씀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성경 말씀에 대한 자신의 소감과 성서학자의 주석(인용된 글)을 은근 마주 보게 세워서 독자로 하여금 과연 우리 인생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가치인가를 음미해 보도록 권장하고 있다. 

예시문 <원수와 이웃>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원수’와 ‘이웃’의 관계다. 혐오하는 이웃이 원수인지, 원수도 이웃이 될 수 있는지, 이웃과 원수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고 또 구분될 수 없는지 등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목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술어(술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그 단어들에 대한 필자 자신의 느낌만 이야기하고 그 단어들이 예수의 어록 속에서 어떤 상호텍스트성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일절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공연히 ‘이성’의 발동을 부추겨서 ‘사랑’의 실천이 이성을 뛰어넘는 그 어디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또 다시 망각하게 만들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에서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삐딱하게 그 목적어에 꽂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는 필자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읽혀야 한다. 이성적인 사유에 매몰되지 말고, 목적어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하라는 주지를 담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예시문 <원수와 이웃>이라는 글의 ‘결’은 종교적인 그 무엇이다. 사랑의 방법과 효능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종교적 화법을 충실히 답습한다. 글 속의 모든 화제들이 그 ‘결’을 따라서 한 줄로 들고 난다. 왜 우리는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렇게 그들 ‘결에 꿰인 글감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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