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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3. 2019

모랄이 미학이 되는 글쓰기

화이부동,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

3) 모랄이 미학이 되는 글쓰기   

  

“소설은 작가의 모랄(morale)이 미학이 되는 유일한 장르다”라고 유명한 서구의 소설이론가가 말했다. 소설이 그만큼 사회역사적인 장르라는 말인 것 같은데, 사실 이 말은 소설에 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 적용되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언젠가 한 토론회에서(졸저 ‘장졸우교’ 독서 토론회 형식의 강연이었다) “처세를 목표로 하는 책읽기가 가장 낮은 것이고 그 다음이 진리를 구하는 책읽기, 가장 높은 것이 윤리적인 목표를 가지는 책읽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인간 행동의 마지막 단계는 윤리적 실천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서 사는 일’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어야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삶이 아예 관심 밖이라면, 굳이 공들여 글을 쓰고 애타게 독자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글을 읽을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도취에 젖어 쓰는 나르시시즘 글쓰기는 하등의 사회적 의의를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공론의 장에서 왈가왈부할 가치가 없다. 자기 혼자, 혹은 자기 가족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은 사회적 담론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 좁게는 소설, 넓게는 모든 글쓰기가 사회적 담론이다. 독백조의 짧은 서정시도 독자를 가지면 그때부터 사회적 담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글쓰기는 모랄과 절연(絶緣)할 수 없는 운명이다. 

모랄과 전혀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는 “내 시는 무의미 시다.”라고 말했던 시인도 있다. 혹평을 하자면 그들은 그냥 ‘글쓰기 벌레’와 같은 존재다. 이기적 유전자의 지배를 충실히 받는 생물학적 존재의 자기 증명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은 진짜 좋은 글을 절대 쓸 수 없다.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글 정도는 쓸 수 있다. 편하게 사는 처세를 가르치거나 남모르는 진리의 일단을 보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을 감동케 하고, 울리고, 독자를 변화시키는 진짜 좋은 글은 결코 써내지 못한다. 평생 글을 쓰면서 살고자 하는 ‘글쓰기 인생’을 도모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진짜 좋은 글이 안 나올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한 번 거기에다 조회를 해 볼 필요가 있다. “내 글쓰기가 혹시 ‘벌레 글쓰기’였던 것은 아닌가?”하고 한 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벌레 같은 사랑소나기     

"인간은 벌레다.", 생물학적 인간관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유전자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시키는 것이고, 우리 인간은 오직 그 유전자의 지상(至上) 명령을 이행하는 기계적인 존재, 이를테면 하수인이나 숙주(宿主)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신세가 벌레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고등동물을 자처하는 인간이나 하등동물인 벌레나 유전자의 숙주라는 측면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고급 종교의 진리의 ‘말씀들’도 따지고 보면 그것(‘인간은 벌레다’)을 에둘러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상(我相)은 본디 없는 것이고(불교), 인간은 한갓 절대자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기독교)과, 생물학적 인간관의, 인간은 그저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하다는 것이 결국 같은 말이겠기 때문이다. 두 말씀 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정되고 있는 존재일 뿐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동아시아의 해방담론, 『장자(莊子)』에서도 소위 ‘인체 유전자 숙주론’의 취지 비슷한 것읗 엿볼 수 있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이야기다.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이 위나라의 영공(靈公)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지혜가 깊고 사리에 분별이 명확해 영공은 그의 말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 뒤로는 영공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而視全人 其脰肩肩). 인간의 감각적 판단이 자립(自立)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에 홀린 듯이 온전한 신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게 된다는 것, 사람의 인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의 통제를 받는 주관적이라는 것,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것은 눈앞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 뒤의 어느 곳에 있다는 말이니 “인간은 벌레다.”라는 말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쓰든 그것을 조정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의식의 ‘뒤’에 있다. 앞에 둔 것은 그저 ‘벌레’일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소나기」를 한 번 살펴보자. 황순원의 「소나기」는 많은 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첫사랑 이야기다. 나는 초등학교 때 형의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그것을 훔쳐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두어 번 연속으로 읽었다. 나중에 교사가 되어서 그 작품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나 싶어, 교사용 지도서나 참고서 같은 것을 봤더니, ‘소년기의 청순한 사랑’이라고 가르치라고 되어 있었다. 작가(3인칭) 관찰자 시점. 길가다 만난 농부의 “소나기가 오겠다.”라는 말은 복선. 대충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마음에 차지 않아서 나중에 박사 논문을 쓸 때 좀 집중적으로 논의의 소재로 삼았다.

「소나기」를 만들고 조정하는 유전자는 모성(母性) 콤플렉스다. 황순원 선생은 소설 「소나기」로 인간의 어머니를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있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 특히 남자들에게는 평생 강하게 작용하는 것, 어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 모성 콤플렉스가 「소나기」의 필수 모티프, 핵심 유전자다. 먼저, ‘콤플렉스(complex)’라는 말에 대해 의견 조절을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말이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편견부터 버려야 한다. 콤플렉스는 마음 상태가 원인 불명(추측만 한다)으로 좀 복잡해져 있다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흐를 때(심리라고 총칭할 수도 있지만 그 표현으로 포괄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것이 한 부분에 가서 좀 복잡한 반응을 야기하는 경우 우리는 그곳(공간적인 비유다)을 심리 에너지의 복합적인 결절점(매듭),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반도체와 흡사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에너지 흐름의 왜곡이 일어나고 강도에도 변화가 오는 부분이다.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듯이, 황순원 선생에게도 그것이 창작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 지점이 어디냐는 것은 물론 추측이다. 소설을 보고 유추한다. 소설, 신화, 전설, 민담 같은 것은 전해 내려오는 콤플렉스의 보고다. 그것을 읽으면서(들으면서), 또 그것을 쓰면서(구연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콤플렉스와 경쟁도 하고 화해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그런 것이 전혀 필요 없다면 물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소나기」가 모성 콤플렉스의 소산, 내 안의 작은 인간, 아들 연인(son-lover)의 사모곡이었다는 것은 ① ‘소녀’가 ‘높은 물’에서 스스로 내려온 존재라는 것(선녀 모티프), ② ‘소년’이 수동적인 성(性) 파트너라는 것(위대한 어머니와 아들 연인), ③ ‘소녀’가 죽는다는 것(절대 희생의 연인), ④ ‘소녀’가 죽으면서 ‘소년’의 체취가 묻어있는 스웨터를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불멸의 연인), 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무시간성 위에서(「소나기」라는 소설은 역사적 시공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전개된다는 것(무의식이 지배하는 담론),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소녀는 소년에게 스스로 와서, 그에게 삶의 지극한 즐거움을 주고, 죽어서 불멸의 연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런 줄거리, 그런 사랑은 당연히 지상(地上)의 연애에서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연애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모두 언젠가 있었던 일인 양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작가의 실제 소년 경험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짧은 이야기가 한 개인의 경험의 구체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동환상에 기반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무의식적 원망(願望)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나기」의 사랑은 지상에는 없다. 다만 우리의 숨겨둔 욕망 안에서나 있을 뿐이다. 있다면, 오직 아들 연인의 사모곡, 그런 불멸의 연인(어머니 같은)을 만나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의 예술적 표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황순원 소설은 언제나 에로티즘을 그 한 가운데에 둔다. 그가 다루는 사랑 이야기는 다종다양하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격동기의 생사를 넘나드는 사랑, 육체적 사랑, 심정의 사랑, 신성의 사랑, 소년기 사랑, 청춘의 사랑, 파멸의 사랑, 구원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름 붙이기 힘들 정도의 다종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그 중에서도 소년기 사랑에 대한 선생의 특별한 관심은 그 소설적 성취가 유난하다. 좋은 소년주인공 소설이 많다. 인간에게 사랑은 어떻게 ‘처음’ 내려오는가, 아마 선생은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꼭꼭 감춰둘 수도 있었던 ‘아들 연인’을 기꺼이 무대 위로 올려 보내신 것 같다. 그 덕에 여태껏 내게도 선생이 내리신 지상의 선물이 귀에 생생하다.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라는 소설 속의 한 대목처럼.   

   

황순원 소설 「소나기」를 ‘모성 콤플렉스’라는 심리학적 개념을 사용해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요약하고 있는 글이다. 일종의 심리비평이다. “일목요연하게 요약한다.”라는 말 자체가 참 무례한 언사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특히 문학 담론이 그런 식이라는 것은 거의 ‘용서받을 수 없는 망발’에 속한다. 수많은 의미의 누락을 전제하면서도 그런 무례와 망발을 저지른 것은 다른 까닭에서가 아니다. 지금은 황순원 소설의 유전자를 말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소나기」라는 소설이 ‘작가가 부르는, 아들-연인의 사모곡’이라는 주장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 묘사해 내는, 아름다운 ‘인물, 사건, 배경’이나, 주제적 층위에서 음미해 볼 수 있는 ‘첫사랑의 신비’와 같은 내용들도 우정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텍스트 무의식 차원에서의 ‘유전자 찾기’는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데?”, 독자들은 그렇게 반문할 것이 뻔하다. 창작심리학적 유전자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작품을 읽고 즐기는 것에 무슨 변화가 생긴다는 말인가? 그렇게 반문하면 대답할 말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유전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이 단원의 목표인 “모랄이 미학이 되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에 답하기 위해서다. 만약 이 글이 무도하거나 무식하거나 무용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면 그 까닭은 오직 하나다. 심리학을 가져와서 황순원 소설의 유전자를 밝히는 동기가 불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세도 진리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아름다움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인간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윤리가 이 글의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황순원 소설이 지상의 온갖 사랑을 다 그려내고 있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낱낱이 밝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황순원 소설이 지상의 사랑에만 매인 것이 아니라 천상의 그것까지 두루 포괄한다는 것을 밝힌 연구는 아주 드물다. 위의 예시문은 황순원 소설의 ‘사랑의 영토’가 지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나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선녀와 나무꾼’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것도 조리 있게 설명하고 있다. 신(神)이 워낙 공사다망해서 자신을 대리할 자를 지상에 내려 보낸 것이 바로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모성애와 관련되어 촉발되는 모든 자식 된 자들의 사랑의 감정은 늘 천상의 가치를 지향한다. 그것을 포착해서 설명의 글쓰기를 진행한다는 것은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모랄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모랄이 미학이 되는 글쓰기가 소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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