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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4. 2019

어떻게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화이부동 4

4) 어떻게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내 아이에게 무엇을 읽힐 것인가? 젊은 부모들이 많이 고민하는 주제 중의 하나다. 물론, 아이들 본인은 그런 시시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좋아하는 것, 재미있는 것, 정 없으면 선생님이나 어머니 아버지가 골라주는 것을 읽으면 된다. 안 읽어도 괜찮고. 아이들 읽을거리에 대한 고민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몫이다. 내가 보기에 그런 ‘어른들의 고민’은 기우(杞憂, 옛날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근심했다는 것에서 나온 말)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 책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책은 저절로 따라온다(책을 읽어야 좋은 사람이 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루마니아 출신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58)는 유년 시절의 독서 체험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은 가난한 농부였고, 책은 집에 없었다.” 소를 키우던 아버지는 “소들은 제가 다 알아서 큰다. 책이 왜 필요하냐?”고 말하는 이였다. 하지만 소녀 헤르타는 공허와 결핍을 느꼈고, “멈춰 버린 채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작가 나이 열다섯 살 때,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막 대통령에 취임한 시점이었다. 그는 “독서는 내게 정치적 독재와 개인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털어놨다.


어릴 때 집안에 책이 전혀 없었어도 얼마든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 인용문의 주인공은 ‘정치적 독재와 개인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고백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나서 좋은 책들을 읽었다는 말로 들린다. 나도 중학생이 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책을 접했다. 그냥 우연한 기회에 재미나는 책들을 접해서 속독으로 읽었다. 남의 책을 빌려 읽는 것이어서 빨리 읽고 돌려주어야 했다. 주로 무협지 같은 대중소설이었다. 책을 읽는 것이 이런저런 효용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본디 책 속에는 길이 없다. 길은 오직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책 속에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등불이 있다. 그 등불이 내 안의 길을 비추어준다. 그래서 읽기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읽느냐’에 종속되어 있다. 무엇을 읽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 안에서 등불을 찾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읽기에 ‘어떻게’가 중요하다면, 쓰기에는 ‘무엇을’이 중요하다. 앞에서 처세의 지혜, 진리의 해명, 윤리의 실천 등이 읽기의 목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 ‘윤리의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고도 했다. 지혜든, 진리든, 윤리든, ‘무엇을 쓸 것인가’가 정해지면 ‘어떻게’는 저절로 따라온다. 글쓰기가 좀 되는 이들은 아예 ‘어떻게’를 무시해도 좋다. ‘무엇을’ 쓸 것인가만 고민하면 된다. 글은 자기가 쓰고 싶은 것, 쓸수록 재미있는 것을 쓸 때 좋은 글이 된다. 쓰기 싫은 것을 억지로 쓸 때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만나서 재미있는 친구와 자주 만나게 된다. 만날 때마다 괴롭거나 서로 심심한 친구와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좋은 친구를 만들려면 스스로 재미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듯이 글을 잘 쓰려면 스스로를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으로 스스로 태어나야 한다. 


나는 30여 년 간 이런저런 대필(代筆)을 해 왔다. 국어 선생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일종의 ‘연설비서관’ 신세를 면한 것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힘들었던 때가 20대 시절 군문(軍門)에 있을 때였다. 모 사령부에 근무할 땐데 중위가 중장의 연설문(간행사, 축사)을 대신 써야 했다. 사령부에서 발간하는 군사 서적의 발간사를 주기적으로 써야 했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령관 연설문을 써 올려야 했다. 그때마다 위에서는 ‘지침’도 없이 무조건 써 올리라고 했다. 그 해의 국방 강조 사항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전호(前號)의 간행사도 참조하고, 이번 호 특집이 무엇인지도 살피고, 최근의 사령관 관심사는 무엇인지, ‘통째로 눈치껏’ 파악해서 초안을 작성하는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암중모색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함량이 너무 미달이어서 사령관급 지휘관의 ‘할 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평소에 자주 대화라도 하는 사이였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밤새 낑낑대며 분량만 겨우 채워서 올리면 그때야 비로소 ‘지침’이 하달된다. 사령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제서야 가르쳐 준다. 그러면 다시 시작한다. 완전히 새 글을 다시 쓴다. 올린 것과 내려온 것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며, 왜 내가 실패하였는가를 반성하며, 또 밤을 지샌다. 어쨌든 그런 고역이 내 글쓰기 공부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때는 무지 고통스러웠는데 나중에 뒤돌아보니 그만큼 공부가 더 되었던 것 같다. 그 ‘간격 메꾸기’ 연습이 어쩌면 내 글쓰기 공부의 한 전환점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럽게 대필자 역할을 맡았던 그 시절에 투고한 작품이 수상작이 되어 소설가로 입신도 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직장을 얻은 후에도 대필자 신세는 면할 수 없었다. 40세부터 50대 초반까지 이런저런 학내 보직을 한 10년 간 했다. 물론 그 동안 총장의 연설문이나 기고문(신문, 동창회보 등)은 모두 내 소관이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글을 썼다. 고전(古典)에서 몇 마디 인용해서 그냥 적당히, ‘공자 앞에서 요령 흔드는’ 소리로 지면을 채웠다. 내가 봐도 별 감동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는 기왕에 하는 거 재미나게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썼다. 현실 무시, 감정 충실,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막 썼다. 그렇게 막 써서 올리니 오히려 수정지시가 없을 때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좋은 글 잘 봤다는 전화가 가끔씩 총장실로 걸려온다는 말도 들렸다. 미친 척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써댔더니 오히려 효과가 있었다. 어디에 가도 원로 대접을 받는 지금, 이제는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쓴다. 이 책도 그 중의 하나다. 글쓰기도 사람이 우선이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예술과 구원달과 6펜스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대표작은 『달과 6펜스』다. 이 소설의 성공으로 그는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묻혀있던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도 재평가되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 소설은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생애에서 소재를 얻어서 쓴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의 위대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런던의 증권회사 사원인 스트릭랜드라는 한 중년 남자가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에 가서 화가가 되고, 다시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 토인 여자 아타와 동거하면서 대작을 남기고 문둥병으로 죽기까지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인간이 삶의 유한성을 예술을 통해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의지, 혹은 예술에 매혹된 한 남자의 도저한 이기주의를 서머싯 몸 특유의 절제된 문체로 냉정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제목의 '달'은 예술에 대한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광적인 열의를 나타내고 '6펜스'는 그가 과감히 던져버린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상징한다.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어떻게 ‘불멸’을 추구하는지를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런던에서 가지고 온, 얼마 안 되는 돈이 다 떨어졌을 때도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중략)그러는 동안에도 그가 그림 그리기를 한 번도 중단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화실에 나가는 일엔 금방 싫증을 내서 결국에는 전적으로 혼자서 그렸다. 캔버스와 물감을 사지 못할 만큼 궁해 본 적은 없었고, 사실은 그 밖의 것은 별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데 퍽 애를 먹었던 것 같다. 워낙 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성미라, 앞선 세대들이 이미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놓은 기법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죄다 혼자 힘으로 발견해 내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무엇인가를 목표삼고 있긴 했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 같다는 인상을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받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그림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캔버스에 쏟아 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림 그리기를 마치면, 아니, 그리기를 마친다기보다 – 그림을 완성시키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으니까 – 자신을 불태운 열정을 소진시키고 나면, 그것에 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상에 비하면 일의 결과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작품을 전람회에 출품해 보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남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그렇소?”

그가 이 두 마디 말에 담았던 그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을 나는 지금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명성을 바라지 않나요? 명성이야말로 대개의 예술가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어린애 같은 짓이지. 전문가라는 치들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어찌 속된 무리들의 의견에 신경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다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지요.” 나는 웃었다.

“명성은 누가 만드오? 비평가, 문인, 주식 중개인, 여자들 아니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감동을 말예요. 기분이 좋을 것 아니에요? 누구든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요. 사람의 혼을 움직여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멜로드라마 같은 소리지.”

 “그럼, 왜 그림의 완성도에 신경을 쓰시죠?”

 “난 신경 안 써요.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을 뿐이지.”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인도에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쓴 글을 저밖에는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두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의 영혼이 마치 뭔가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나도 때로 생각해 보았소.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그 절해고도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로 들어가서 신비로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볼 수 없을까 하고. 거기에서는 내가 바라던 것을 찾을 수가 있을 것 같거든.”

그가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몸짓으로 대신했고, 가다가 말이 막히기도 하였다. 그가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나의 말로 표현해 본 것뿐이다. (서머싯 몸/송무 옮김, 『달과 6펜스』 중에서. 일부 표현 인용자 수정)     


스트릭랜드는 이른바 하이퍼그라피아이다. 그림 그리기 중독자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적인 욕구를 그림으로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 행위가 주는 쾌(快)가 다른 모든 유혹들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계속적으로 그것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것이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 내용을 그와의 대화 장면을 통해 서머싯 몸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어쩌면 그건 서머싯 몸의 생각일는지 모른다. 그 무엇이든 관계없는 일이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모든 예술가들이 만약 그런 동기와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생산해 낸다면, 예술은 일차적으로 예술가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예술을 옹호하는 대중들은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을 위한 술을 빚어낸 뒤 (그것을 마시고) 홀연히 떠난 곳에서 고작 버려진 술지게미(재강에 물을 타서 모주를 짜내고 남은 찌꺼기)나 주워 담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작가의 영혼이 담긴, 농밀한 증류주와 같은 것이어서 내가 그것을 마시고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명백한 환상이다.     

인용문에서 필자는 “예술은 예술가에게만 구원이다”라는 주장을 편다. 예술품은 술지게미와 같은 것이다. 예술가들이 구원을 받고 난 뒤에 벗어놓은 날개옷에 불과하다. 그것은 오로지 예술가들만 입고 날 수 있는 옷이다. 대중들은 그저 그들이 하늘을 나는 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글을 쓸 때는 무엇을 쓸 것인가에 집중하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쓸 때 좋은 글이 나온다.”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주장이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다. 실제로 서머싯 몸은 고갱의 가족의 부탁으로 고갱을 만나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때의 만남을 토대로 『달과 6펜스』라는 명작을 썼다. 소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고갱)는 예술에 미쳐서 가정과 직장을 버린다. 그리고 살아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할 불멸의 작품들을 그린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는다. 물론 세간적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 정작 그 자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가 죽었을 뿐이다. 필자는 『달과 6펜스』를 ‘구원을 얻는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으로 읽는다. 그리고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한다. 물론 예시문에서 하고 싶은 말은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쓸 때 좋은 글이 나온다. 문제는 무엇을 쓸 것인가이다.”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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