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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4. 2019

상식, 공통된 감각

common sense

상식적 인간    

 

균형 감각이 있고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을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부릅니다. 그런 이들은 보통 상식(common sense)에 충실한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상식에 충실하다는 것은 ‘혼자 살기’보다는 ‘같이 살기’에 높은 비중을 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의 호감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이치를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 상식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기 때문이다. ‘상식(common sense)’은 아주 오래된 단어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이 교차되는 지점에 일종의 ‘공통적인 감각’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을 서로 비교하고 통합해 이성의 판단과는 또 다른 차원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공통적 감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근대에까지 이르러 성숙한 존재의 조건을 정의한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성적 사유와 더불어, 시대의 가치를 공유하는 상식적인 사유가 가능한 사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김정운, 『남자의 물건』]    

 

상식을 ‘공통적인 감각’으로 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성과 상식은 때로 따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들렸습니다. 그 둘을 잘 조합해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논리가 비상식적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common sense’의 ‘sense’를 두고 볼 때 그런 말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금방 들었습니다. ‘식(識)’이 꼭 이성적인 활동의 결과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제가 경험한 지난 시대의 정치적인 삶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시대의 가치를 공유하는 상식적인 사유’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제 정신이 아닌 것’일 때가 많았습니다. 정치 권력이 요구하는 이성적 사유와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상식적 인간’이라 함은 언제나 ‘전두엽 장애현상’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에 의거한 주체적 판단은 불온한 것으로 치부되고 금기시 되었습니다. 정치 권력이 강권하고 일상의 이해관계가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오늘도 무사히’라는 동류의식이 모든 공통적인 감각을 지배했습니다. 그것이 선사하는 안도감만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상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늘 핍박이 주어졌습니다. 

     

‘이성과 상식의 조화’를 통한 성숙한 인간으로의 진입이라는 밀린 숙제를 하는데 남은 제 인생의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 정치 권력의 부침을 목격하면서 타율적으로 느낀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상식, 통합된 감각에 의해서입니다. 그동안 제 주변에서 겪은 것들도 많이 참조가 되었습니다. 두어 번 ‘희생양의 존재 양태’를 제 몸으로 겪기도 했고, 한 순간에 도덕(道德)과 의리가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얐습니다. 인간이란 결국 불쌍한 존재이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육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 혹은 체면과 도덕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버렸던 역사적인 인간들이 왜 그렇게 예외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왜 죽고나서야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건강한 상식을 살아낼 수 있는 여생이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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