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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9. 2019

수재와 둔재

천재와 광기

수재(秀才)와 둔재(鈍才)


얼마 전에 구내식당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칭 둔재인 이가 수재를 성토했습니다. “머리 좋은 것들이 오히려 더 파쇼다”, “머리 좋은 것들은 양보나 희생을 모른다. 그들은 늘 분열한다”, “머리 좋다고 사람 좋은 건 결코 아니다”,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로부터 자주 듣던 이야기들입니다. 아마 그렇게 되지 말라고 ‘사랑의 매’처럼, 자주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열에 아홉, 머리 좋은 아이들이 심성도 착했습니다. 간혹 한두 명 아닌 아이도 있긴 했습니다만, 진짜 머리 좋은 아이들은 남의 비난을 받을 짓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실천 의지도 강하고 절제력도 있고 운동도 즐겼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지금도 모두 정정합니다(페이스북에서도 종종 만납니다). 

저는 머리 좋은 사람들을 그렇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한두 명 인성 부족한 ‘머리 좋은 것들’에게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해도 섣불리 일반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 ‘못난 욕심’이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언제가 “머리 좋은 사람이 좋은 대통령 된다”라는 글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당연히 그 직무를 잘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확률이 높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정치와 같은 허업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남의 비난에 노출되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아무래도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할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공부는 <천재와 광기>입니다. 무엇이든, 좀 알게 되면 편견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 경험상으로도 예술에 있어 대천재는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예술과 수학 모두에 훌륭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알피에리(1749~1803, 이탈리아의 비극 작가. 고전적인 형식으로 된 19개의 희곡을 남겼다)는 유클리드의 제4정리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괴테의 색채론(괴테는 뉴턴과 달리 색채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양극적 대립현상으로 본다. 괴테는 그의 색채론을 통해 데카르트와 갈릴레이, 뉴턴에 이르는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초래할 위험성을 경고했다)에 대해 분별심 없이 반박을 가하는 사람들은 괴테에게는 수학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물론 색채론에서는 가설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는 계산이나 측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과 관계를 직접 오성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비난은 과녁을 빗나간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훌륭한 수학자는 미술 작품에 대해 그다지 감수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프랑스의 대수학자가 라신의 《이피제니》(‘정념의 비극’이라 일컫는 대표적인 라신 비극 작품)를 읽은 후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인과성의 법칙이나 동기 유발의 법칙에 따라 여러 관계를 날카롭게 파악하는 것이 지적 작업의 일반적 형태이지만, 천재의 인식은 관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그가 현명한 한 천재는 아니고, 또 천재는 그가 천재인 한 현명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데아는 그 영역 내에 존재하고 있는 직관적 인식과 인식의 이유율에 인도되는 이성적 또는 추상적 인식과는 대체로 정반대다. 또 대천재가 훌륭한 이성의 작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 드물다는 것도 알려져 있고, 오히려 천재적인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격한 감정과 비이성적인 격정에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부는 그 천재적인 개인과 의지 행위의 격렬성에 의해 밖으로 나타나는 의지 현상 전체의 이상한 에너지 때문이고, 일부는 감성과 오성에 의한 직관적 인식이 추상적 인식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과 대화를 해도 상대편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화제가 되고 있는 문제가 더 생생하게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쪽을 먼저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흥미 때문에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말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인 경우에도 잠자코 있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독백을 하게 되고 실제로 광기로 여겨질만한 약점을 드러낼 때가 있다.

천재와 광기는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또 서로 어울리는 일면을 갖고 있다고 가끔 이야기된다. 플라톤은 이것을 컴컴한 동굴 이야기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동굴 밖에서 햇빛과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데아)을 본 사람들은 그 눈이 어두움에 길들여 있지 않기 때문에 후에 동굴에 들어와서는 사물을 보지 못하며, 거기에 있는 여러 영상을 식별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들은 실패를 하고, 이 동굴에서 한 발짝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이 영상들만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런 점에서 괴테의 《타소》는 특히 가르쳐 주는 바가 많다. 이 희곡에서 괴테는 천재의 순교라고 할 수 있는 고뇌뿐만 아니라 그 고뇌가 점점 광기로 변해가는 것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천재와 광기가 직접 그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은 루소, 바이런, 알피에리 등 천재적인 인물의 전기를 보아도 확인할 수 있고, 천재의 생애에 대한 일화를 보아도 확인된다. [쇼펜하우어(권기철 옮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중에서]


위의 내용을 읽다 보니,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소외감은 우리가 ‘관계’에 많은 가치를 부여할 때 그들은 ‘주제’에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식 범위도 서로 다르고 관심 사항도 서로 다르니까 (내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위의 내용도 일부는 편견이 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수학자와 예술가를 너무 대립시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천재와 광기’라는 주제를 만족시키려다 보니까 일부 극단적인 사례를 가져다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무튼 <수재와 둔재>는 종이 한 장 차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 사진은 마리당 1만5천원에 팔리고 있는 ‘한국고양이’. 다른 비싼 외국산 고양이처럼 쇼윈도에 전시되지 못하고 길바닥에 나앉아 있다. 30여 년 전에 길에서 500원에 산 고양이를 집에서 키운 적이 있었다. 졸작 <고양이 키우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500원짜리 고양이 덕이다. 이제 몸값이 수십 배 뛰었지만 처량한 신세는 여전하다. 그때는 비싼 외국산 고양이들이 시중에 나돌기 전이었다. ‘한국산 고양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마치 ‘한국산 백두산 호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갈치 시장 입구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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