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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18. 2019

친구 인생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

친구 인생     

아침에 일어나니 창밖으로 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푹푹 찌던 날씨가 한풀 꺾인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더위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더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늘어집니다만, 좋게 생각하자면 그만큼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고 좀 일에 좀 게을러도 양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시사철 더운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역지사지에도 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발랄한 상상까지 듭니다. 오늘은 ‘친구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옛날이야기 한 토막 전해 올리겠습니다. 별 뜻은 없으니 아침에 내리는 ‘더위 식히는 비’처럼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 많던 고민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고민이래야 당일치기 불쾌감밖에 없습니다. ‘당일치기’도 최근에는 딱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후배인 직장 동료가 ‘인사성 없이’ 구는 게 좀 불쾌했었습니다. 무언가 제게 불만이 있는 것 같았는데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정도로 데면데면하게 노는 게 좀 불쾌했습니다. 처음에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한두 해 지나면 서로 안 볼 처지이니 없는 듯 여기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 녹듯 불쾌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깊고 푸른’ 젊은 날의 걱정거리들이 다 사라져버린, 혹은 고무줄이 다 늘어나버린, 이 노년의 ‘고민 없는 현실’ 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어리고 젊었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늘 고민에 빠져서 살았거든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무아지경에 빠져서 살 날이 올 것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평생 그럴 줄 알았는데, 고민 없는 인생이 고민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음은 온갖 고민에 사로잡혀서 살던 고등학생 시절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때로는 형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고, 때로는 그 태평함에 질투심마저 들게 하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전 학년이 운동장에 앉아서 누군가의 강연을 듣던 때였습니다. 옆에 앉아있던 그 친구가 뜬금없이 제 손금을 봐 주겠다고 청했습니다. 무심코 그에게 제 손바닥을 맡겼습니다. 보는 둥 마는 둥, 제 손을 한 번 쓱 만지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년고생(初年苦生)이 말년부귀(末年富貴)를 부른다, 늘 고민이 많으니 속이 안 좋을 상이다.” 초년고생이 말년의 편안함을 부른다는 말은 이해가 쉬웠습니다(그런 바람 하나로 살던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손금을 봐준다면서 ‘속이 안 좋다’라는 말을 하는 그가 좀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토를 달았습니다. ‘속이 안 좋다’가 무슨 뜻이냐고요. 그랬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알아서 해석하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어감 상으로 “속이 좁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혹시 소화기능이 안 좋다라는 말이 나올까 기대했는데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무렵의 저에게는 저의 약점인 그 ‘속 좁음’을 어떻게든 좀 다스릴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 친구처럼 만사태평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내던 때였습니다. 또 하나, 매번 성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고쳐 보려고 오매불망하던 때였습니다. 그 치명적인 조급함을 결단코 내쫓아보려고 그야말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그걸 알고 딱 꼬집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노력을 비웃는 듯한 그의 도발적인 언사에 저는 순간적이나마 현기증 비슷한 것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여튼 그의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비아냥 덕분에 저는 그 후로 더 작심하고 내색 않고 제 속을 다스리는 일에 좀더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제가 속이 넓어졌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메모리 용량을 넓혀봐야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이나 기계나 매 일반입니다. 최적화 작업을 아무리 빈번하게 행한다고 해서 용량 자체가 획기적으로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처리 속도를 조금 높인다거나 있을 수 있는 ‘충돌현상’들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정도의 효과는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충격’을 준 그 친구는 몇 달 뒤 또 충격을 안겼습니다. 뜬금없이 저에게 학생회장 선거에 한 번 나가보라는 거였습니다. 가형(家兄)에게서 연전에 그 비슷한 권유를 받은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만(그때는 부회장 출마 권유였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년 뒤에 친구에게서 그런 권유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형편에서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같은 반의 한 친구가 출마선언을 하고 나섰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보다는 제가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 ‘손금 봐준 친구’의 말이었습니다. 몇 번의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제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은 도전이다.”, “이번이 너의 인생을 크게 한 번 바꾸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 그런 소리가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출마를 선언한 친구와 이런저런 담합을 벌인 끝에 제가 회장, 그 친구가 부회장으로 나가기로 결정을 봤습니다. 결국,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진 않았지만, 우리는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이, 친구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제가 이 세상에 나와서 벌인 가장 볼만한, 최초의 ‘의지를 가지고 행한 사회적 활동’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자기에게 이르는 도정’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었습니다. 그런 청춘기의 우정과 함께 하는, ‘자기에게 이르는 길 찾기’에 대한 묘사는 『데미안』의 「야곱의 싸움」 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피스토리우스」, 내가 갑자기 말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악의가 담겨 있었다. 「제게 다시 한 번 꿈 이야기를 들려주셔야겠어요. 밤에 꾸신 진짜 꿈 이야기를요. 지금 말씀하시는 것, 그건 참 빌어먹게 골동품 냄새가 나네요!」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 자신도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번개같이, 내가 그에게로 쏘아버렸고, 그의 심장을 맞춘 화살이 그 자신의 무기고에서 꺼낸 것이었음을 수치와 충격으로 느꼈다. 그가 냉소적 음색으로 이따금씩 내뱉던 자기 비난의 어휘들을, 이제 악랄하게도 내가 그에게 한껏 극단화된 형태로 던졌던 것이다.

그도 그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즉시 잠잠해졌다.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그를 보고 있자니, 그는 무섭게 창백해지는 것이었다.

길고 무거운 침묵 후에 그가 새 장작을 불 위에 얹었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전적으로 옳아, 싱클레어. 자네는 영리한 친구야. 나는 골동품으로 자네를 지켜주려는 걸세」

그는 매우 침착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가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에게로 향하고 싶었다. 그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에게 나의 사랑, 나의 애정 어린 감사를 확인해 주고 싶었다. 감동적인 말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엎드려 불을 들여다보며 말이 없었다. 그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워 있었고 불은 타내려가다 꺼졌다. 탁탁 튀기며 꺼지는 불꽃 하나와 함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움과 친밀함도 다 타서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을까봐 두렵습니다」, 내가 마침내 몹시 풀이 죽어 건조하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신문 연재소설을 낭독하는 듯이 멍청하고 무의미한 말들이 기계적으로 내 입술 너머로 새어 나왔다. 

「난 자네 말을 정확히 이해했네」,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자네가 옳아」, 조금 뜸을 들인 다음 그는 천천히 계속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맞서 옳을 수 있는 바로 그만큼 말일세.」

아니, 아니, 나는 마음으로 외쳤다. ‘제가 틀렸어요!’라고. 그러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단 한 마디 보잘 것 없는 말로써 그의 본질적인 약점, 그의 괴로움과 상처를 가리켜 보였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불신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점을 내가 건드렸던 것이다. 그의 이상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났다>. 그는 과거를 향한 구도자였다.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깊이 느끼게 되었다. 피스토리우스는, 그가 나에게 준 것을 그 자신에게는 줄 수 없었으며 내 눈에 비쳤던 그의 모습도 그의 실체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는 길잡이인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신이나 아실 일! 나는 전혀 나쁜 뜻이 아니었고 파국의 예감도 없었다.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에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입 밖에 내어버린 것이었다. 약간 위트 있고 약간 악의 있는 소소한 착상 하나에 굴복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운명이 되어버렸다. 나는 부주의한 작은 횡포를 저질렀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심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야곱의 싸움」, 167~169쪽]     


‘피스토리우스’는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데미안 이후로) 싱클레어가 만난 인생길의 충직한 멘토였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그를 이끌었던 믿음직한 친구였고 작은 스승이었습니다. 그에게서 길(자기에게 이르는)을 봤고 그를 통해 인생의 큰 고비 하나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싱클레어는 대못을 박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길 안내가 필요없다고 내지릅니다. 그리고는 후회합니다. 그 대목이 너무 리얼합니다. 아마 이런 장면 한두 개는 너나없이 모두 필히 가지고 있지 싶습니다.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보다 이 장면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데미안은 너무 초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는 한결 우리와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와 싱클레어의 만남과 헤어짐은 마치 소설이 아니라 현실 속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길에서 우리는 때로는 싱클레어로, 때로는 피스토리우스로 살아갑니다. 내게 없는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다주는 친구도 있고, 내게서 그것을 찾아가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주고받는 임무에 충실하다 보면 한 세월이 다 갑니다. 비단 친구 사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런 이치는 여전(如前)합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식들도 언젠가는 <나에게 준 것을 그 자신에게는 줄 수 없었으며 내 눈에 비쳤던 그의 모습도 그의 실체는 아니었다. 그는 길잡이인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길로 나를 인도했다.>라고 기꺼이 나를, 우리 부모 된 자들을, 이해할 것입니다.     

사족 한 마디. 40년 전에 ‘나에게로 향하는 길’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한 친구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다른 한 친구도 최근에는 소식을 접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까지 꽤 그럴듯한 사업 구상을 가지고 투자자를 물색하고 다니는 걸 봤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인생말년이긴 하지만 친구의 원대한 포부가 늦게나마 활짝 펼쳐질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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