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Jul 17. 2019

나는 잊고저

한용운의 화작

화작(化作)

날씨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긴 글도, 복잡한 논리도 은근히 미워집니다. 짧게 시 한 수 읽어보려 합니다. 문학평론가 정효구 충북대 교수는 승려 시인 한용운의 시작(詩作)을 ‘화작(化作)’의 일환으로 보자고 하는군요. 기독교와 불교를 두루 섭렵한 독실한 종교가이기도 한 정 교수는 대각을 이룬 보살행이라는 관점에서 『님의 침묵』을 읽고 그 사랑을 함께 누릴 것을 제안합니다.


...‘화작(化作)’이란 불교의 보살행의 최고 단계로서 보살이 인연 따라 무한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이때 보살행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서 ‘지금, 이곳’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살아내며 승화시키는 일이다.
사무애(四無碍)는 널리 알려진 불교의 수도 및 수행의 특성이자 단계를 알려준다. 사무애(事無碍), 이무애(理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가 그것이거니와 초기 단계의 사무애와 이무애도 속인으로는 참으로 성취하기 어려운 단계이자 세계이지만,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단계는 더욱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자 세계이다. 특히 두 가지 경지이자 세계 가운데 사사무애의 단계는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보살행의 궁극인 바, 이 사사무애의 단계에서 나오는 것이 ‘화작’의 마음이자 행동과 삶이다. [법륜, 『깨달음』(정토출판), 정효구,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푸른사상), 28쪽에서 재인용]  


화작으로서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용운의 「나는 잊고저」라는 시가 유난히 눈에 띕니다. 제가 보기에는 「님의 침묵」보다 이 시가 더 낫습니다(훨씬 더 사사무애의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잊고저>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해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히기로
행여 잊힐까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히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할까요


귀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해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정효구, 위의 책, 143쪽. 표기 일부 현대어로 수정함(인용자)]


간혹 남의 작품을 읽으며 법담(法談)의 경지를 욕심낼 때가 있습니다. 욕심이 좀 과했던 때도 많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절감합니다. 「나는 잊고저」 한 편으로 일단 그 ‘법담에의 욕구’들을 다 청산해야겠습니다. 나중에, 한 번이라도 ‘무애(無碍)’의 문턱에 제 발끝을 걸쳐본 다음에 다시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나는 잊고저」 한 편으로, 그 모든 욕망에 시원한 등목 한 번 끼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베아트리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