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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25. 2019

더위와 수신

몸 공부의 중요성

더위와 수신(修身)     

연일 더위가 장난이 아닙니다. 밖으로 나서기가 겁날 지경입니다. 어디 시원한 곳을 찾아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옛말에 ‘소나기는 피하고 본다’고 했는데 지금 같아선 더위도 일단은 피해야 할 듯합니다. 어려서부터 특히 여름에 활동량이 많았던 저로서는 피서(避暑)라는 말이 실감되기가 살아생전 처음입니다. 아마 나이 탓도 좀 있지 싶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공부 없이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인간은 몸과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둘은 하나이지만 때로 전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구별 없이 하나로 설명하는 쪽도 있고(생물학적 인간관)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습니다(불가, 유가적 인간관). 저는 마음도 몸의 일부라고 보는 쪽에 더 호감을 가집니다. 마음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도가(武道家)의 한 사람으로서 몸 쪽에서 마음 쪽으로 나아가는 게 이치에 어울린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믿습니다. 몸이 마음으로, 또는 마음이 몸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몸에서 마음으로’ 쪽입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반드시 ‘발산(發散)’시켜서 소진해야 할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몸의 존재 양태 중의 하나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고 설명하는 쪽에서도 몸의 의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토대이다. 마음은 몸의 한 기능이며 표현이다. 몸은 우리 마음이 근거하는 거처이다(주자는 <인간의 본성은 도의 형체이며, 마음이란 본성의 집이고, 몸이란 마음의 거처이며, 사물은 몸이 타고 다니는 배와 수레다(故康節云 : 性者, 道之形體; 心者, 性之郛郭; 身者, 心之區宇; 物者, 身之舟車)>(『朱子語類』 권1, 3쪽)라는 소강절의 말이 매우 좋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음은 몸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즉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어떤 현상도 몸 혹은 기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자는 우리 몸과 마음의 관계를 초와 촛불의 관계로 설명한다. 초가 없이는 촛불이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각하고 인식하는 우리 마음의 작용은 몸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중략>

한편 마음은 몸의 주인으로서 몸을 주재한다. 모든 행위에서 마음은 그것을 주재하며 이런 점에서 마음은 우리 몸을 부리는 주재자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우리 마음이 가 있지 않으면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며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몸과 마음은 상호 연관된 일체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음은 몸에 나타난다. 따라서 수양의 내용도 몸과 태도에 나타나야 한다. 또 몸을 먼저 바로 함으로써 마음을 바로 할 수 있다. 유가에서 개인 수양을 <수심(修心)>이라 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입장은 고대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예기』와 『논어』에는 덕 있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많다. 가령 <수신>의 지침으로서 『예기』에 거론된 군자의 모습을 보자.     

군자의 모습은 여유 있고 한가로워야 한다. 높은 사람을 볼 때는 단정하고 삼가야 한다. 발의 모양은 무겁고, 손의 모습은 공손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하고, 입의 모습은 조용하고, 목소리는 고요하며, 머리 모습은 곧게, 기상은 엄숙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럽고, 안색은 엄숙하고, 앉은 모습은 시동(尸童) 같아야 한다.     

유가에서 특히 인간의 행동거지를 세밀한 곳에까지 주목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불가분의 일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생각은 움직임이 숨어있는 것이고 행위는 움직임이 드러난 것이다. 생각은 안에서 움직이고 행위는 밖에서 움직인다.>(『近思錄』권5) [김수중, 「유가의 인간관」,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마음이 몸의 주인으로서 몸을 주재한다는 주자의 말씀에 100% 다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전혀 마음의 말을 듣지 않을 때도 많이 겪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들을 만한 설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수심(修心)’이 아니라 ‘수신(修身)’이어야 하는 이치를 밝히는 대목이 더 그렇습니다. 유가에서 개인 수양을 <수심(修心)>이라 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몸과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 마음은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는 깨침에 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쇠와 같습니다. 접어서 두드리고 두드려야 정련됩니다. 날 때부터 강철인 쇠는 없습니다. 불순물 없이 강하고 질긴 쇠를 만들려면 스스로 부단히 접고 두드려야 합니다. 불패의 환상에 대한 믿음, 그 부단한 반성적 성찰뿐만이 아닙니다. 부단히 몸도 움직여야 합니다. 몸이 예(藝)를 얻어서 예(禮)를 지향하도록 피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수신(修身)’ 없는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닙니다. 

<2012. 7. 25.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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