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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27. 2019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

수파리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검도 공부를 할 때 자주 듣는 말로 ‘수, 파, 리(守破離)’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 나온 말이라 합니다. ‘지키고 깨고 떠나라’는 뜻입니다. 지키는 것(守)은 선인(先人)들이 쌓아온 경험의 교훈들을 남김없이 답파하는 것을 뜻합니다. 검도에서는 연습(練習)한다는 뜻으로 계고(稽古, 옛일을 자세히 살펴 공부함)라는 말을 씁니다. 기예(技藝)의 세계에서는 물려받는 일이 그만큼 중합니다. 기예를 익히는 자들은 누구나 수련 시간의 대부분을 ‘계고’에 할애합니다. 같은 동작을 매일 반복하고 그 숙달에 진력합니다. 도복(道服)을 벗고 있는 시간에도 선인들의 가르침이 담긴 책들을 보면서 옛것이 주는 교훈을 찾습니다. 행여 놓친 것이 없나 노심초사합니다. 그렇게 계고에 치중하다 보면 부득불 “이러다 언제 깨고 언제 떠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 하나 몸에 붙이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모자라는데 언제 ‘나만의 것’을 찾아서 떠날 수 있을 것인지 막연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수파리’라는 가르침이 그 자체로 공연한 관념놀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익히다 보면, ‘한 사람의 일생만 가지고는 다 이룰 수 없는 경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몸으로 하는 것일 경우 ‘조금 알 만하면 몸이 쇠하여 그 끝을 볼 수 없는’ 아이러니가 운명적으로 존재합니다. ‘수, 파, 리’가 밖에 있는 어떤 경지를 기준으로 그 뜻을 새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깨고 떠난다(破離)’라는 말씀을 좀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키는 것(守)’은 밖에서 찾지만 ‘깨고 떠나는 것’은 안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그것의 표면상의 의미만을 중시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깨고, 나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라고 해석하지 말고, 배운 것을 잘 지키되, 자기가 이룬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그것을 과감히 깨고 떠나기를 반복하자는 격언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깨고 떠난다’라는 걸 ‘내 자신의 소박한 경험으로 얻은 것들을 깨고 떠나는 것’으로 새겨듣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다는 것(學習)은 결국 앞에서 익힌 것들을 ‘깨고 떠날’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앞에서 배우고 익힌 낮은 단계를 고집하지 않고 부단히 그것을 부정해 나갈 때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정작 지킬 것(守)은 그런 ‘수, 파, 리’를 몸소 실천한 옛 선인들의 가르침이고, 깨고 떠날 것(破離)들은 오로지 내 작고 비좁은 경험칙들입니다. ‘깨고 떠나는 것’은 공부가 지속되는 한 단 한 시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어지면 거기서 공부도 끝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과신(過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기대 밖의 성공으로 이어진(운이 따라주어서), 그렇지만 그야말로 소박한 것인, 그런 불로소득(?)일수록 더 위력이 있습니다. 가히 일당백입니다. 그럴 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말은 듣기(百聞)와 보기(一見)의 대립이 아니라, 소문과 경험의 차별을 뜻합니다. “내가 겪어본 일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철칙이 됩니다. 세간적인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서 그런 경험에 대한 과신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 크는 것은 어디서나 그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을 마다하지 않을 때입니다. 나를 부정하고 타자의 경지를 스스럼없이 인정할 때 사람은 성장합니다. 선생이 되어 이것저것, 무엇이든 가르치다 보면 반드시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이나 경지로 ‘알아듣게’ 설명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주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그런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개중에는 모든 앎이 속으로는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경험칙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사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에 하나의 줄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크는 것은 그야말로 일기일경(一機一境)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특히 자기 성찰을 요하는 앎의 세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수시로 ‘깨고 떠날 일’들이 필수적인 곳이 그곳입니다.     

스스로 그런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것이 바로 공부의 요령일 것입니다. 늘 어제의 것을 버리고 내일의 것을 향하라고 독려할 때 성공한 공부인(工夫人)이 될 수 있습니다. ‘수, 파, 리’는 그래서 모든 공부의 헌법이 됩니다. 단지 수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체의 측면에서, 공부의 경지를 부단히 업그레이드 시키는 강제(强制)의 규범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넘은 ‘문턱’이 오늘의 ‘내 소박한 경험’이 되어 새로운 ‘문턱 넘어서기’를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는 것 ‘수, 파, 리’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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