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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28. 2019

소설가의 사명

가라도, 고비

소설가의 사명     

소설이든 역사든, 인간의 행동을 평가하고 기록하는 일은 윤리(倫理)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사에 그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당위(當爲)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게 보면 도덕 교과서나 역사책이나 소설 나부랭이가 모두 한 통속입니다. 공자님 말씀이나 삼국사기나 홍길동전이나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입니다. 겉모양은 모두 달라도 그것들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서 모두 한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소설의 초창기 모습이 ‘의사역사(擬似歷史)’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저 소가진설(小家珍說)이어야 하는 것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것은 ‘전기(傳奇)’라 해서 사실은 따로 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판타스틱한 요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로 단편소설의 이야기감으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본령은 ‘사실적인 것’, ‘역사적인 것’, ‘윤리적인 것’에 두고 발전되어 온 것이 소설이라는 말씀입니다.     

푸코는 역사와 소설이 오십보백보의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른 것(역사적 사실)에 의탁(依託)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 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닌 듯싶습니다. 소설도 사건을 다루는 것이기에 늘 객관적인 팩트(facts)를 가장(假裝)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역사도 무엇을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사관(史官, 史觀)의 취사선택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백프로 객관적인 팩트의 나열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팩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범죄의 재구성’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역사적 기록)는 1차적 왜곡이고 소설(역사소설)은 2차적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소설가가 기존의 역사적 기록(1차적 왜곡)이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적 진실’에 지나치게 배치되는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면 그것을 대상으로한 2차적 왜곡(소설화를 통한 역사적 진실의 탐구)을 언제라도 감행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소설이 존재하는 한 방식(존재론적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소설이 의사역사(擬似歷史)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진수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를 압도하는 것만 보더라도 쉬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그 진위(眞僞)를 따지는 일이 가끔씩 벌어집니다. 특히 그 ‘소설(영화)적 진실’이 자신의 이념이나 취향에 배치되는 것일수록 그런 비판적인 언설이 자주 토로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런 비판적 독서(감상)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제법 관객이 들자, 한 일간신문에서 역사학자 두 사람을 불러 ‘광해군은 어떤 정치지도자였나?’에 대한 지상 토론을 게재한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인 ‘정치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하는 자여야 한다’에 비추어 광해군의 애민(애족) 통치철학을 논해 보자는 것은 당연히 우리시대의 언론(신문)이 다루어야 할 토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적 층위’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방식에 대한 흥미 위주의 험담이라면 그런 토론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 영화 속의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허위이므로 그런 엉터리 영화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몰상식입니다.     

영화는 논리적 코드가 아니라 심미적 코드, 혹은 사회적 코드의 지배를 받는 예술적인 창작품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사회적 코드가 심미적 코드에 기생할 경우에는 그 형태가 아주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심청이가 죽은 몸으로 다시 부활하고(孝行),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서 논리가 닿지 않는 ‘대박’의 수혜자가 되고(善行), 춘향이도 기생의 딸로 태어난 몸으로 말도 되지 않게 정경부인이 되는 것입니다(貞節). 그런 극단적인 결말이 가능한 것은(그리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들 효행이나 선행, 정절과 같은 사회적 코드가 소설(판소리)이라는 심미적 코드에 기생(寄生)했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역사소설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데뷔작 중의 하나인 「가라도(伽羅都)」와 그 다음 작품이었던 「고비(古碑)」가 그런 관심의 소산이었습니다. 나중에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념이 생겼습니다만, 제가 그런 소설(요즈음 말로 팩션)에 관심을 두었을 무렵에는 그런 장르 개념조차도 없었습니다. 「가라도(伽羅都)」는 사다함과 무관의 죽음을 같이 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고비(古碑)」는 광개토왕비 비문 조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위작 시비가 있긴 했지만 <화랑세기>의 등장으로, 후자는 비문 조작의 증거가 없다는 중국 역사학계의 발표로 ‘대체 역사’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습니다. 그 소설들이 주장하는 소설적 진실에도 크게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신라시대의 성(性)풍속(특히 왕실을 둘러싼)에 대한 <화랑세기>의 증언(보고)은 저로서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광개토왕비 조작설에 대해서는 특정 학설에만 매달렸던 결과로 충분한 사료(史料) 검토가 뒤따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저의 자괴감은 상당한 지경이었습니다. 불학무식한 주제이면서도, 역사의 공백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메꾸어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입니다. 역사라는 게 그런 식으로 ‘보완되거나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모르기도 했지만 좀 순진했습니다. 당연히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틀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만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부끄러움’을 철회해야 되겠습니다. 당연히 역사 소설을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한 다짐도 철회해야겠습니다. 소설가의 사명은 언제 어디서든 ‘윤리’에 기여하는 일이라는 것 하나만 생각하겠습니다.

<2013.7.2.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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