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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29. 2019

가죽 인생

갑과 호완

가죽 인생     

검도의 보호 장구를 호구(護具)라고 합니다. 얼굴(머리와 목, 어깨 포함)을 보호하는 것을 호면, 허리(가슴과 배 포함)를 보호하는 것을 갑(甲, 갑옷의 준말), 단전 이하 무릎 위를 보호하는 것을 갑상(甲裳), 손과 손목을 보호하는 것을 호완(護腕)이라고 합니다. 검도 경기는 이 보호 장구가 보호하고 있는 부분을 타격해야 승점(勝點)으로 인정합니다. 보호구이면서 동시에 타킷이 되는 셈입니다.     

갑: 호구(護具) 중에서 만들 때 가장 미적(美的) 고려가 많이 들어가는 것이 갑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갑의 가슴 부분의 무늬는 상대의 죽도가 미끄러져 목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귀운(鬼雲)이니 삼송(參松)이니 해서 구름 무늬, 소나무 무늬 같은 것들이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잘 만든 갑은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가슴 무늬와 배 부분의 절묘한 연결과 조화가 보는 이의 미감을 자극할 때가 많습니다. 소재 역시 지극히 미적입니다. 갑의 겉면을 만드는 다양한 가죽과 여타 소재들, 그리고 가슴 부위의 화려하고 정교한 무늬와 색채가 주는 미학적 느낌은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만족감을 줍니다. 그 부분이 대체로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무도와 관련된 자기 동일성을 규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당연히 갑은 그것을 차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가장 많이 주는 호구입니다.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실제로 만족스런 갑을 착용했을 때 느끼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태까지 검도를 배우면서 착용한 갑의 수효도 꽤 됩니다. 처음 입었던 것은 대학 선배가 검도에 입문했을 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다음 거쳐 간 서너 개는 아들과 제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네 개입니다. 거의 새것인 것도 두 개 있습니다. 그것들은 보기에 좋아서 그냥 두고 봅니다. 언젠가는 이것들도 새 주인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주인 없이 구경거리만 되는 것은 항시 수명이 짧습니다. 특히 가죽 제품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도 ‘가죽 제품’이긴 매 한가지로군요.     

호완(護腕) : 놓여진 호완들을 보면 내 안의 폭력성을 대면하는 것 같습니다. 사용하는 호완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검도도 격투기의 일종인지라 '주먹(완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모든 무도의 첫째 가는 기술이 힘이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팔 힘, 다리 힘이 빠지면 무도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됩니다. 여름 휴가를 맞이해 연구실에, 차에, 도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들을 모아서 바람에 잘 말리고 끈도 다시 매었습니다. 개중에는 수제품이라 가격이 수 십 만원 하는 것도 있습니다. 얼마 전, 문 닫는 호구점에서 싼 값으로 새로 산 것까지 해서 모두 네 벌입니다. 모든 매니아들이 다 그렇겠지만 무도가로서 호구와 죽도를 만지는 그 시간의 즐거움이 아주 큽니다. 모든 세간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것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그만큼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걱정이군요. 이것들을, 그 옛날처럼, 너덜너덜하게 손바닥 쪽이 헤어지고 손등 쪽 가죽이 터져서 속엣 것들이 툭툭 삐져나오도록 신나게 한 번 써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나이들어 그런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아마 앞으로 평생을 해도 가진 것 중에서 한두 개 정도 그런 신세가 될까 말까 할 겁니다. 몇 년 전에는 아끼고 아끼던 신품 호완 하나를 옛 직장 동료에게 선물했습니다. 모처럼 만났는데 호완 걱정이 컸습니다. 자신의 호완이 수명을 다했는데  주위에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손에 딱 맞는 것 하나 구하고 싶다고, 혼자 넋두리를 하기에 차 트렁크 안에 두었던 그것을 그냥 주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염색이나 박음질이 워낙 물색이 좋아 언젠가 한 번 멋지게 끼고 싶었던 것인데 싣고 다니기만 하다가 진짜 주인에게로 갔습니다.     

 

사족 한 마디 : 호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먼저 간 고등학교 동기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서로 구역이 달라서(노는 물이 달라서) 얼굴과 이름만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나이 들어 같이 검도를 배우게 되어 종종 만나던 친구입니다. 중고 시절에는 야구를 했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골프를 한 스포츠맨이었습니다. 자기 사업장을 가지고 골프 코칭도 하고 대학에 강의도 나가던 학구파였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자신이 만든 아주 고급진 호완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최고급품에 속할 만한 좋은 호완이었습니다(가격도 보통 것의 두 배 정도 되었습니다). 모모한 사범에게서 수주 받은 것인데 이제 완성이 되었다는 거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재주를 다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어릴 때부터 떨어진 야구공 깁는데 이골이 나 있던 차라 호완 제조 기술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만지는 가죽이 훨씬 부드러워서 더 쉽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죽을 만질 때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또, 자기가 만든 것을 최고로 여기고 기분좋게 사용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버린 지도 거진 십 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망설이지 않고 가장 고급진 소재로 친구의 수제 호완을 하나 얻어두지 못한 게 후회가 됩니다. 정말 보기 좋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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