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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31. 2019

부끄러움을 모르면

영화 혈의 누

부끄러움을 모르면


영화를 보다 보면, 예외 없이, 한 마디씩 기억에 오래 남는 ‘명언(名言)’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본 영화들에서는 ‘도둑이 도둑 걸 훔치는게 무슨 죄가 되는가’(도둑들), ‘자네 임금이 되고 싶은가?’(광해), ‘우리는 돈만 턴다’(간첩),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다’(혈의 누)와 같은 말들이 그런 ‘명언’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개중에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도 있고, 오로지 독자나 관중들의 그때그때의 심사가 반영된 결과인 것도 있습니다. 때론 그 둘이 상호텍스트적으로 합쳐져서 큰 임팩트를 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대사가 제겐 그랬습니다. 그 대사를 듣는 순간, 그 영화의 작가(감독, 김대승) 이름이 제게 깊이각인(刻印)되었습니다. 앞으로 그의 작품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그 대사는 동화도라는 섬의 토호 아들인 작중 인물 김인권(박용우)이 자신을 연쇄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체포하러 온 육지의 군관 원규(차승원)에게 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섬에 있는 제지소 주인 강객주(천호진) 일가를 몰살시키는 일에 의식, 무의식적으로 공모한 사이입니다. 김인권의 아버지 김치성 영감은 제지 기술을 지닌 강객주가 제지소를 세울 수 있도록 땅을 제공한 자입니다. 그는 한때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던 잔반(殘班)입니다. 섬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지요. 그는 정조가 죽고 노론의 세상이 오면서 강객주의 정치적 후원자가 실각하자 때 맞추어 그를 천주교 신자로 몰아서 제거합니다. 섬 사람들이 모두 강객주에게 빚을 지고 사는 처지를 이용합니다. 은혜를 항상 원수로 갚는 인지상정을 이용한 것입니다. 강객주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강객주의 무고함을 변론하지 않습니다. 강객주가 제거되고(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합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진 빚을 탕감 받게 됩니다. 그 일을 처리한 토포사(討捕使)가 이번에 섬으로 파견된 포청 군관(軍官, 수사관) 원규(차승원)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랫것 주제에 갑작스럽게 부를 축적하고 민심을 한 몸에 얻고 있는 강객주를 ‘보다 더 큰 차원에서’ 제거합니다. 절차를 무시하고 선참후계(先斬後啓)합니다. 원규는 그 사정을 모른 채 공납선(貢納船) 화재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화도라는 외진 섬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화재 역시 강객주의 딸 소연의 연인이었던 인권이 5적(강객주를 서학자라고 무고한 다섯 사람) 중의 하나였던 호방(戶房)을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렇게 얽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사 중에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영화를 소개하고 있는 영화 홍보용 글 일부를 옮겨와 보겠습니다(인터넷에서 옮겨오면서 일부는 수정했습니다).


* 1808년 조선시대 후반, 제지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외딴 섬마을 동화도. 어느 날 조정에 바쳐야 할 종이가 수송선과 함께 불타는 사고가 벌어지고, 사건 해결을 위해 최차사(최종원)와 수사관 원규 일행이 동화도로 파견된다. 섬에 도착한 제 일일(第一日, 영화는 하루하루의 일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화재사건의 해결을 서두르던 원규 일행 앞에 참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과 혈우가 내렸다는 소문에 마을 사람들은 7년 전, 온 가족이 참형을 당한 강 객주의 원혼이 일으킨 저주라 여기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 ‘내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날... 내가 너희들의 피를 말리고 뼈를 바를 것이다!’ : 영화 <혈(血)의 누(淚)>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인직의 신소설에서 제목을 빌려 왔다기보다는 영화 속 연쇄살인사건의 시작을 암시하는 피비, 즉 '혈우'를 글자로 압축해, 血<피 혈>, 淚<눈물 누>의 한자 그대로 ‘피 눈물’이라는 뜻을 형상화한 것이다. 영화 <혈(血)의 누(淚)>의 미스터리한 연쇄 살인 사건은 혈우가 내렸다는 소문에서부터 그 공포가 시작되고, 이 피비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이 흘린 한이 담긴 눈물이라는 의미로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때문에 <혈(血)의누(淚)>는 영화 속 중심이 되는 사건의 이미지와 히스토리를 동시에 담고 있는 타이틀이다. 마지막에 실제로 혈우가 내린다. 이 영화의 주제는 그래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된다.

* ‘동화도’는 고립된 섬이다 : <혈(血)의 누(淚)>에서 참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은 다름 아닌 고립된 섬 ‘동화도’다. 영화가 잔혹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고립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섬'이라는 특이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그곳은 우리의 ‘의식의 고립성’을 표상한다). 그곳에서는 ‘열린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 자체적으로 정화 작용을 이루어낼 수 없는 인간 소집단에서의 ‘욕망의 탈주’를 잘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섬이다.

* ‘동화도’는 부의 축적을 이룬 곳이다 : 육지와는 달리 당시의 섬은 외부와의 교통이 제약을 받는다. 활발한 물류 이동을 통한 부의 축적도 어렵다. 그러나 ‘동화도’는 제지소 건립과 운영을 통해 부의 축적을 이룬 곳이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망’이 마음것 나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곳이다. 섬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서 이루어 놓은 ‘부의 평화’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다른 무엇에 의해서 침탈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그들의 평화를 일그러뜨리는 작은 변화가 그래서 거대한 사건을 불러오기도 한다. [daum 영화 참조. 일부 내용 수정 보완]


●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폭력성은 언제나 그 출구를 찾아서 헤매고 있다 : ‘동화도’는 민본사상이 움틀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공간이었다. 강객주는 ‘능력에 따라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섬 마을 사람 모두에게 골고루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민심은 지배권력의 폭력 앞에서 그를 배신한다. 그들은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음으로써 강객주의 원혼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제지소 주인 김치성 영감의 아들 김인권(박용우)은 민심의 초자아를 표상한다. 그가 하는 말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이다.


영화 <혈의 누>(김대승, 2005)는 좋은 영화입니다. 한국 영화 중에서 이만한 콤포지션(구성력)을 지닌 영화도 드물 것입니다. 화면도 좋고 스토리텔링도 꽤나 짜임새가 있습니다. 두 번 째 볼 때가 훨씬 더 재미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모두 제 역할을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주역, 조역 할 것 없이 모두 다 잘해 내고 있습니다. 다만, 주제가 조금 무거운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입니다. 관객이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내고 있다는 점이 불만(?)이라면 불만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충고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오직 자신을 ‘칭찬하는 말’만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요. 영화를 보러 들어간 사람들로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만을 강요해서는 관객을 모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비루함, 비겁함, 야비함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도록 위로하는 영화만이 관객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도둑들>이나 <광해>와 같은 영화들에서처럼 말입니다.

사족 한 마디 : 저에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혈의 누>에서의 대사 한 마디가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 역시 ‘동화도’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행된’ 모종의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강객주(천호진) 일가를 몰살하고 그들에게 진 부채(負債)를 탕감해 주겠다는 ‘폭력의 제안’을 비루하게 받아들인 몹쓸 집단 속에서 저 역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군가 김인권(박용우)처럼, 그 모든 ‘불편한 진실’을 밝혀내고 하늘에서 피비(血雨)가 쏟아지도록, ‘양심의 가책’을 독려하는 ‘연쇄 살인’을 저질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자작(自作), 그런 일을 마음 속으로 벼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쨌든 영화 <혈의 누>는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을요.
<2013.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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