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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08. 2019

십년

돈의 효용

십 년

나이가 들면서 새로이 느끼는 것이 어디 한두 개에 그치겠습니까만 개중에는 좀 기특한 것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제 안에 벌써부터 들어와 있는 것들을 자주 만납니다. ‘발견의 기쁨’을 누리는 영광(?)을 마주합니다. 최근에 읽은 정진홍 선생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감상문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선생이 인상적이었다고 해서 따로 빼내 기록해 두신 부분 중에 그런 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옮겨보겠습니다.


“내게 최선의 것은 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개와 달리 아무 욕망 없이 생을 관조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잘도 하는 너희들의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관조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 의지를 죽이고 자기중심적인 음모와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몸은 차갑고 타다 남은 재와 같으면서도 취기어린 달의 눈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에게서 더없이 좋은 것은 달이 이 대지를 사랑하듯 이 대지를 사랑하고 달처럼 눈길로써만 그 아름다움을 더듬는 것이리라.” 유혹당한 자는 이렇게 자신을 유혹한다.
“그리고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 앞에 드러누울 뿐 그 사물들로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 그런 것을 나는 온갖 사물에 대한 때 묻지 않은 앎이라고 부른다.”
오, 성마른 위선자들이여, 음탕한 자들이여! 너희들의 갈망은 순진무구하지 못하다. 너희들이 그 갈망을 비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렷다! 진정, 너희들이 창조하는 자, 생식하는 자, 생성을 기뻐하는 자들로서 이 대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순진무구란 것은 어디에 있는가? 생식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자, 그런 사람이야말로 더없이 순수한 의지를 갖고 있는 자다. [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중에서]


정진홍 선생은 인용된 부분의 발언을 지나치게 ‘순진무구하다’라고 강평하십니다. 어떤 발언이든 모두 ‘제 자리에서만’ 옳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진무구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까지 강변하십니다. 아마 정선생님께서는 독실한 유신론자(기독인)이신 것 같습니다. 저 같이, 유신론자이면서도 니체의 ‘순진무구’에 동조하는, 오래되어 너덜너덜한, ‘나일론 신자’와는 많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저는 이렇게 토를 달고 싶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발언에는 각기 자신을 옹위하는 ‘제 자리’가 있습니다. 신들에게도 그 율법을 거부할 자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는 그 율법의 강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순진무구’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율법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서 숨쉽니다. ‘순진무구’는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든 옳습니다. 당연히 ‘순진무구’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진무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요. 

얼마 전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책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던 이유도 저의 그런 반성과 유사한 어떤 심리적 계기에 힘입은 바가 꽤 있었을 듯합니다. 물론 반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몹시 바라는 것들 중 제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은 무시해버려야 속이 편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야 나의 돈 없는 형편이 조금 덜 억울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여년 전,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는 말이 한 번 크게 나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저도 그 말을 열심히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정말이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좀 더 넓은 집, 좀 더 크고 안락한 차, 좀 더 태깔이 나는 비싼 옷, 좀 더 달고 기름진 음식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건강을 살 수도 없고, 자식 공부도 살 수가 없고, 가정의 화평도 살 수가 없고, 돈독한 우정도 살 수가 없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정말 돈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들로 세상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습니다. 나이 들어 바랄 게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생도 없습니다. 나이 들어 궁핍한 삶은 젊을 때와는 달리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각박합니다. 내 인생에 행복감을 이식할 공간이 애초에 마련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느 정도는 돈을 꼭 가져야 합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노년에서는 정확히 진실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돈이 있어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누릴 수 있는 수명도 달라질 추세입니다. 돈 없으면 친구들도 외면합니다. 가정의 화평은 아예 기대조차 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돈이라는 관문(關門)’을 통과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습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반대로 바뀌어버렸습니다.

10년만에 인간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싶습니다. 제 일인데도 그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바깥의 세상은 여태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저 혼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겠습니다(그때는 또 ‘헛되고 헛되도다’라며 뒤로 자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지금은 돈이 소중한 것이라는 걸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산 선생의 ‘돈’에 관한 말씀도 ‘세상모르는 말씀’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돈’에 사로잡힌 인생이라 ‘돈’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다음 이야기도 아마 그래서 제 눈에 쏙 들었던 모양입니다.


“은유란 하나를 다른 것과 비교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러시아 수정주의자들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실제로는 쓰레기가 아니지만, 마오 서기장님은 그들을 쓰레기라고 부르고 있어요. 바로 이것이 은유라는 거예요.”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가오 지앙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는 학급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였다.
“질문이 뭐죠?” 웬리 선생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선생님은 러시아 수정주의자들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쓰레기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마오 서기장님께서는 분명히 쓰레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죠?”
웬리 선생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쓰레기가 아니에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그들을 쓰레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이에요.”
“그들도 인간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니우 펜이 대들었다.
“그, 그래요.” 웬리 선생이 말했다.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중 많은 수는 웬리 선생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아니, 틀린 것만이 아니라 반동적이기까지 했다. [하 진 「십 년」, 『문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이남호)에서 재인용]


중국 문화혁명기의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입니다. 갓 부임한 처녀 선생님은 은유를 가르치려다 사상이 불온한 반동분자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그녀가 범한 죄는 일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녀가 신성불가침의 절대자의 말을 비유로 해석한 것이 마오교의 신도들이었던 학생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절대자의 말은 비록 비유로 사용되었어도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것입니다. 돈이 비유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비유로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절대적인 것들은 언제나 비유를 깔아뭉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 끌린 것은 물론, 그런 뻔하디 뻔한 ‘비유론 놀음’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그런 ‘비유를 깔아뭉개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화혁명기의 에피소드’ 정도로는 이 늙은 시골무사의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십 년」이라는 데에서도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웬리 선생의 10년 후의 모습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임한 그녀는 말을 할 때마다 볼만이 아니라 귀까지 빨개졌다. 그녀는 늘씬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자였다. 손가락이 길고도 가느다란 그녀의 손은 정말 고왔다.”던 그녀는, 문화혁명도 끝나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도시의 인민은행 책임자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초등학교의 부교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뚱뚱한 몸과 살찐 얼굴을 가진 그녀는 달걀 하나 때문에 이웃 여자에게 욕을 퍼붓는 중년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통속적인 스토리텔링이 좋았습니다. ‘10년’이면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 인생이 늘 그 정도의 기간을 두고 변덕을 부려왔던 까닭이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16.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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