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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07. 2019

이기는 기술

싸움의 기술1

이기는 기술


어떤 싸움판에서든 ‘이기는 기술’은 확실한 것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두 번, 세 번씩 써서 이기는 것은 필살기가 아닙니다. 인생지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필살기(必殺技), 득의(得意)의 기 하나만 있으면 인생만사가 만사형통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번 사는 기간 동안 그런 필살기 하나만 있으면 그의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저것 많이 아는 것, 많이 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은 한 번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격 필살기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 하나 얻는 데 이사람 저사람, 이 공부 저 공부 그렇게 많은 스승과 학문이 아니라는 게 제 ‘살아본 소감’입니다.


검도 공부로 한 번 환유해 보겠습니다. ‘싸움의 기술’을 탐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부지불식, ‘사람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술’은 사람이 부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늘 ‘사람’과 함께 갑니다. ‘기술’에 대한 경탄이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기술’에 대한 불만이 ‘사람’에 대한 경멸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사람들과 장기간 집중적으로 ‘기술 싸움’을 하다보면 당연히 서로를 잘 알게 됩니다. 상대방의 인품을 알게 되고(때리고 맞는 극단적인 상황 아래에서의) 상대방 기술의 ‘코드와 맥락’에도 숙달되게 됩니다. 간혹 ‘인간에 대한 실망’이 앞서는 수도 있습니다만 대개의 경우 그래서 더 친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것을 검도에서는 ‘교검지애(交劍知愛)’라고 표현합니다. 서로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이든 사람이든, 맞수를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서로에게 소중한 ‘인생의 기회’입니다. 서로 상대의 기술을 잘 알게 된 상황에서도 승부가 오락가락 한다면 그날그날의 컨디션이나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의 기술 배합이 승부를 좌우한다고 보면 됩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그 동안의 팽팽한 균형을 깨고 어느 순간부터 승률을 일방적으로 높여 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쪽이 ‘싸움의 기술’을 확실하게 한 단계 높이는데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가 만약 상대를 이기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이길 수 있는 경지(필승의 득의의 기)에까지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면 이미 그는 동료가 아니라 선생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그런 관계가 엎치락뒤치락 한다면 그 두 사람은 날로 실력이 향상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대 교대로 서로에게 선생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막상막하의 일대일 승부 상대를 적어도 1년에 한두 명씩만 겪어낼 수만 있다면 10년 안으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선생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담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범 자격을 막 얻어 의욕적으로 검도교실을 운영할 때의 일입니다. “누구는 스승이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거론하며 자기 제자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습니다. 아마, ‘스승 모시기’에 소홀해서는 크게 될 수 없으니 너는 나를 잘 모셔라는 뜻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한 검우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제게 전하는 겁니다. 너는 독학자라서 더 클 수 없다는 뜻으로 전했습니다. 본디 무도란 것은 스승의 몸에서 제자의 몸으로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인데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하수도가 상수도가 되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제겐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 친구가 마치 ‘한 소식 들은 것처럼’(신현락, 「고요의 입구」) 그 말을 전하는 바람에 언뜻 듣기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자기처럼 하는 것, 즉 스승의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제대로 된 검도 수련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스스로 익히려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인데 그 친구는 스스로 익히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싶었습니다. 보결생이라도 좋으니, 좋은 학교에만 적을 두고 있으면 공부는 절로 되지 않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제겐들 왜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런 식의 사제관계가 아니었을 뿐 제게도 쟁쟁한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스승에게서는 집중적으로,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씩 배웠고(그때 일은 졸저 『칼과 그림자』에 소상히 적어두었습니다), 한 스승에게는 지금껏 배우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예고도 없이(이번에는 몇 년만에 오셨습니다) 불쑥불쑥 제자의 도장에 들이닥쳐서, 제자들 보는 앞에서, 숨 막히게, 사지에 마비가 올 정도로, 호되게 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분이지만 저도 그 분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맞수’의 느낌을 주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저는 오늘도 스승의 눈, 그 ‘감시자’ 아래서 부단히 ‘싸움의 기술’을 익히고 있습니다(이 글 역시 그런 절치부심의 일환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정 ‘한 소식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때까지는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2013. 8. 7.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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