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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4.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소설 속의 화자

이야기의 주인공화자


친구 중에 재미난 이가 한 사람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대가(大家)급 전기수(傳奇叟, 전문적인 이야기꾼)다. 이야기보따리를 한 번 풀어놓으면 끝이 없다. 서너 시간은 너끈하게 혼자서 좌중을 쥐락펴락한다. 사회적인 인간관계도 폭이 넓고 직업적인 면에서도 능력이 꽤 인정되고 있는 친구여서 여기저기서 이 친구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이른바 지역 사회의 명망가인 이 친구도 친구들 앞에서는 스스럼없이 익살스런 이야기를 자주 털어놓는다. 물론 음담패설도 압권이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역시 ‘그것이 알고 싶다’ 풍의 사건 분석과 해설이다. 물론 좌중의 양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종횡무진으로 ‘범죄의 재구성’이 이루어진다. 온갖 역사적인 사건에 빠짐없이 주체적으로 개입해서 참견하고 토를 단다. 좌중이 좀 어리숙하다 싶으면 ‘사건(해결)의 배후’에 자신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고 공연한 공치사를 늘어놓기도 한다. 듣고 있으면 그럴듯하다. 확인할 수 있는 성과나 결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과 픽션이 교묘하게 섞여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이른바 ‘대체역사소설’과 엇비슷한 재미마저 선사한다. 어쨌든 기본 플롯은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매번 정교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어서 들을 때마다 새롭고 재미있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원인(原因)이 생략되어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왜 그가 그 자리에 있었느냐는 질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 걸 물으면 안 된다는 게 그가 벌이는 이야기판의 불문율이다. 그냥 그런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그냥 현장에 가 있다. 굳이 동기를 밝힐 필요가 있다 싶으면 그저 “누가 불러서 그 자리에 갔다” 정도로 얼버무린다. 왜 자기를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말이 없다. 그 부분에서 소설가와 똑같다. 소설가들도 온갖 일에 참견한다. 누가 시키지도 안았는데 이야기를 들려주고, 늘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술 취한 자들과 행색이 비슷하다. 어쨌든 한두 번 그의 소설을 맛본 사람들은 그가 왜 이야기를 하는지, 또 왜 늘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지에 대해서 일절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재미있고 유익하고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데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그는 일반 소설가들처럼 자기를 위해서(돈을 벌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순순히 들어주면 가끔씩 실물적인 보상(報償)도 뒤따른다. 그러니 모두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의 작은 선물 같은 물질적 시혜도 있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인맥을 조달해주는 은사(恩賜)도 내린다. 나도 경험한 일이라 늘 이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고 유익하고 고마운 화자(話者)다.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은 화자(話者)다. 작가조차도 때로는 그에게 양보할 때가 있다. 화자 역시 사회적 존재여서 입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의 본 역할인 작가의 심부름꾼 되기를 한 번씩 거부할 때가 있다. 이른바 화자의 침입(侵入)은 이야기의 성격과 독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1,2인칭으로 주인공을 가장하는 화자보다는 숨어 있는 화자(3인칭 시점-화자)가 훨씬 더 단순하다. 일, 이인칭 시점-화자는 드러내 놓고 ‘나’와 ‘너’를 과시하지만(사회적 삶을 살지만), 삼인칭 화자는 늘 자신을 감춘다. 그래서 작가가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다. 물론 그런 구별은 큰 의미가 없다. 이야기에 몰입하는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독자의 시점-화자와 융합하면서 독립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작가나 독자의 영향력 밖에 존재하는 그 독립적인 시점-화자의 목소리를 ‘텍스트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누구를 통해 말하는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독립적인 독자 측 시점-화자 앞에서는 텍스트의 화자(작가가 설정한 시점-화자)는 항상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한다. 

그렇지만, 3인칭의 시점-화자가 늘 그렇게 쉬운 상대인 것만은 아니다. 나중에 보면 생각보다 복잡한 인물일 때도 많다. 작가가 이른바 ‘행동의 아이러니(이야기의 핵심인 주인공의 행동이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서 정 반대의 의미를 획득하게 됨)’를 목표할 때는 더 그렇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인물의 ‘사회성’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을 수도 있고, (남에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감추어 둔 ‘허영’이 있을 수도 있다. 내심 미운털을 박아둔 사람이 있어 틈날 때마다 그를 (표 나지 않게) 욕해야 할 때도 있고, 자기만의 정치적인 입장도 있어서 (틈만 나면)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수행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3인칭 시점-화자는 그 모든 것들을 ‘남의 일’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서 삼인칭의 시점-화자는 무거운 칼을 가볍게 쓰는 검법(화법)에 통달한 작가들이 자주 사용한다. 

오래전 일이다. 난생처음 일간지 신춘문예에 투고를 했는데 최종심에 작품이 오르는 영광을 맞이했다. 시골의 독학생, 천학 비재의 신세로는 크게 감읍할 일이었다. 전전긍긍, 예측불허의 습작생 입장에서는 마침내 ‘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심 심사위원은 황순원, 전광용 두 선생님이었다. 아마 황선생님이 쓰신 것 같았는데 심사평에 실린 몇 마디 말씀을 요약하면 결국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은 인정되나 묘사가 약하고 관념이 승하다”였다. 투고작이었던 「가라도(伽羅島)」는 이른바 대체역사소설이었는데(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장르가 낯설었던 때였다) 일인칭 시점-화자를 내세운 소설이었다. 주인공이 젊은 역사학자였고, 그가 학회에 참석했다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역사의 공백을 메꾸는 짧은 소설을 쓴다는 내용이었다. 액자소설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고 액자 내부 소설이 소설 속의 소설로 ‘대체역사소설’이었다. 신라 화랑도 전승 중에서 사다함과 무관의 우정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였다.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정치적 결사였다는 가공의 역사 스토리텔링이었다. 본디 액자소설의 도입부는 일인칭 화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동인의 「배따라기」도 그렇고 김동리의 「무녀도」나 「등신불」,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나 「줄」도 다 그렇다. 액자 부분 이야기가 액자 안의 내용을 인증(認證)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걸 강조한다) 넓고 얇은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3인칭의 시점-화자보다는 깊고 좁은 제한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는 1인칭의 시점-화자를 기용하는 것이, 이야기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훨씬 더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액자소설의 형식’에 충실했던 작품에 “관념이 승하다”라는 지적이 떨어진 것은 아마 ‘액자’ 부분에 과도하게 노출된 역사학적인 소견들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문학인데 역사라는 ‘학문’이 너무 문학 속으로 침입했다는 평가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그런 판단이 들어서 액자 부분의 화자를 1인칭 시점-화자에서 3인칭 시점-화자로 교체했다. 화자를 ‘나’에서 ‘김대위(사관학교 교관)’로 바꾸었다. 그런데, 그런 화자 교체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를 ‘김대위’로 바꾸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그대로 맞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경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고도(古都)의 석양은 그 무게감부터 달랐다”를 그저 “김대위가 경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고도(古都)의 석양은 그 무게감부터 달랐다”라고 고치면 그만이었다. 거의 다 ‘나’를 ‘김대위’로만 교체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내 이름을 ‘나’로 부르다 ‘김대위’로 부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건 거의 장난 수준이 아닌가 싶기도 했었지만, 그것이라도 해야 배우는 자의 도리일 것 같아 그대로 진행을 했다. 주인공의 일상을 담은 장면 두어 개도 첨가했다. 그리고 작품 두 개를 더 써서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하고 몽매에도 바라던 ‘소설가’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소설의 화자에 대해서 말한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화자가 ‘나’로 명시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화자가 침입적이거나 아니거나 자의식적이거나 아니거나 신빙성이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화자는 또한 자신이 이야기하는 사건들의 참여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참여자일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1인칭 서사물이라고 칭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1인칭 화자는 다른 것보다도 자신이 직접 가담한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자로서의 1인칭과 작중 인물로서의 1인칭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유산』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인이 된 핍은 그 어린 시절의 핍과 같지 않습니다. 또 『모든 신하들』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윌리 스타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잭 버든은, 대학원에서 역사 공부를 하고 두어 번 신경쇠약에 걸린 적이 있고 윌리를 위해서 일한 잭 버든과 똑같지 않습니다. 

화자가 작중 인물이 아닐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3인칭 서사물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되는 사건들이 제삼자들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화자가 작중 인물이면서도 비교적 빈번하게 자신을 마치 제삼자인 것처럼―여러 작중 인물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고의적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대커리의 『헨리 에즈먼드』에서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대부분 3인칭으로 이야기하고 있고(이 회상록들에서 해리 에즈먼드의 대학 시절 일을 더 이상 소상하게 살펴본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에즈먼드는 자신이 그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기쁨에만 도취되어 떠났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리외 의사는 이 소설의 대부분을 통해서 리외 의사라고 자신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제랄드 프랭스(김상규 역), 『서사학』 중에서]


일인칭 서사물이든 삼인칭 서사물이든 전달되는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는 방법의 차이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화자의 ‘사회성’은 이야기에 어떤 ‘느낌’을 가미할 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느낌’이 이야기의 무게나 깊이를 좌우할 때도 있다. 마치 음식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향료나 양념처럼 때로는 독자들의 미각을 사로잡고 풍미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독자들의 미각을 마비시킬 수도, 매료시킬 수도 있다. 특히 역사소설일 경우, 이야기의 전체적인 것은 그런 부수적인 것들, 이를테면 ‘화자의 사회성’ 같은 것들에 의해 좌우될 때가 많다. 고도로 숙련된 독자들은 이야기의 내용보다 ‘화자의 사회성’을 먼저 따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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