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Feb 25.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인물, 사건, 배경

구성 혹은 음모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성(構成)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구성’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조립해서 완성품을 만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조립을 하려면 부분적인 성분이나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서사에서는 인물의 행동이 그것이 된다. 그러니까 서사의 구성은 결국 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구성이 중요한 것은 그 ‘배치’가 서사의 효과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단단하게 서사문을 작성하는 요령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주제 문제, 화자 문제, 구성 문제로 대별된다. 자기가 직접 발견한 주제가 가장 큰 효과를 낸다는 것, 화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니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제대로 된 화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행동의 배치, 구성의 문제는 주로 인물, 사건, 배경과 관련되어 자주 논의된다. 그것들의 정합성이 구성의 효과를 좌우한다. 

앞서 예로 든 <취하는 것>에서 핵심이 되는 ‘인물의 행동’은 유씨 아저씨의 무용(武勇)이다. 그러나 그것 혼자서는 아무런 효과도 낼 수 없다. 다른 인물의 행동이 전제되어야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를테면, 관련 인물들(변상태, 덕구)의 행동(덕구의 배덕과 변상태의 몰락)과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전쟁의 후유증)이 유씨 아저씨의 무용을 떠받쳐 줘야만 이야기 속의 핵심 행동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유씨 아저씨의 무용이 윤리도 되고 응징도 되고 복수도 되고 대리 보상도 되는 것이다. 

<몰개월의 새>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자가 주인공에게 ‘발견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월남전 참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극단화한다. 그중에서 가장 첨예하게 극단화되는 것이 사랑의 문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인문학적 주제도 전쟁을 배경으로 할 때 보다 분명하게 제시될 수 있었다. 의미 없는 죽음이 남발되는 전쟁 상황이야말로 사랑을 전경화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배경이 된다. ‘나’나 ‘미자’는 전쟁이라는 배경이 만들어 낸 한 쌍의 오뚝이 인형이다.

구성을 음모(intrigue,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인물들의 행동을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조립, 조합한다는 뜻이다. 음모로서의 구성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이 추리 서사다. 작가의 서사 인지 능력과 독자의 그것이 가장 많은 격차를 보이는 시작 부분과 가장 적은 격차를 보이는 결미 부분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연결되는가에 추리 서사의 성패가 달려 있다. 얼마나 정교하게 그것을 연결할 수 있는가가 결국은 작가의 역량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서사물은 음모로서의 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 엽문 사부한테 배웠다는 건 뭐예요?

-엽문 사부 얘기도 자네가 먼저 꺼냈잖아. 난 그 사람 이름을 그때 처음 들어봤어. 다 자네 입에서 나온 얘기야.

그랬던가? 삼촌은 허탈한 기분에 술잔을 들었다.

-처음에 여기서 군만두를 훔쳤을 때 나를 쓰러뜨렸잖아요. 그럼 그 솜씨는 도대체 뭐죠?

-쓰러뜨리긴 누가 쓰러뜨려. 자네가 도망가다 문턱에 걸려서 혼자 고꾸라진 건데. 그리고 얼마나 굶었는지 홱 잡아채니까 수숫대처럼 그냥 힘없이 자빠지더라고. 난 영춘권은커녕 태권도도 한 번 배워본 적이 없어.

-저, 정말 무술을 못한다고요?

-그래, 주방에서 칼이나 잡는 내가 무슨 무술을 하겠어? 그냥 다 자네가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지. <중략> 

삼촌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그 상상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화산이 솟구치듯 무언가 안에서 치밀어 올랐다. 삼촌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칼판장의 얼굴에 힘껏 주먹을 날렸다. 그 통에 테이블이 넘어지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칼판장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삼촌은 그런 칼판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씨발,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천명관, '나의 삼촌 브루스리'>


『나의 삼촌 브루스리』는 이를테면 ‘환멸의 플롯’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소룡의 광팬인 ‘삼촌’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영화가 만들어낸 부질없는 환상을 쫓던 ‘삼촌’이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좌절과 성취의 목록들을 소설은 재미있게 펼쳐낸다. 그중의 하나가 인용문에서 보는 ‘주방장’ 환상이다. ‘삼촌’은 자기 멋대로, 자기 환상 속에서, 주방장(칼판장이라는 2급 주방장)을 무술의 고수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환상이 깨어지는 아픔을 몸으로 겪는다. 이 소설의 독자들은 작가와 공모해서 주인공을 농락한다. 환상 속에서 헤매는 주인공을 조롱하고 동정하며 동병상련의 읽기 환상에 젖는다. ‘삼촌’의 행동이 일종의 환유로 작용하는 것을 즐긴다. 소설 속의 인물을 풍자하는 것이 결국은 소설 밖의 독자들을 풍자하는 일이라는 것을 천천히 알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이 지닌 큰 미덕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는 ‘삼촌’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강조한다. 

일종의 ‘교육의 플롯’을 보여주는 무협지의 한 대목을 인용해서 구성론의 대미를 장식해 보자. 무협지는 정형화된(패턴화 된) 인물의 행동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수많은 이야기 변종(變種)들을 만들어낸다. 구성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서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판에 박힌 이야기들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와룡생의 『무유지(武遊誌)』에서는 그런 ‘판에 박힌 무협지’를 넘어서려는 작가의 시도가 눈에 띈다.  

    

....노인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방조남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교활한 가운데 사람의 본색을 잃지 아니하고, 독한 심술 가운데 인자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이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만이 당금(當今) 강호(江湖) 도처에서 날뛰고 있는 괴물 같은 흉악한 무리들과 한 번 자웅을 겨뤄볼 수 있을 거라.”

자탄(自嘆)하듯이 하는 말에 방조남은 아리숭하니 알 듯 모를 듯했다. 그러나 공명한 뜻을 물어볼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큰절을 세 번 계속하고는 몸을 일으켰다.<와룡생, '무유지'>  

    

무림기인 소림사 각몽(覺夢) 대사가 자신의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사용해 방조남에게 상승급(上乘級) 내공을 주입시켜주려고 마음먹는 대목이다. 방조남의 인물됨을 정확하게 진단해 내고 그의 문제 해결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방조남의 ‘교활함과 심술’은 독자들에게는 이미 낯익은 것이다. 무유지의 작가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각 장면마다 방조남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린다. 거의 심리소설 수준이다. 주로 상황 속에서 가능한 의심이나 이기적인 타산(打算)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점이 무유지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이로써 방조남이 저속한 평면적인 인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인간적인 결함’은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의심이나 타산이 실행에 옮겨지기 직전에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생겨 그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매번 그에게 ‘대의(大義)와 인정’에 따른 행동을 강요하게 되고 매번 그런 상황적 행동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방조남은 무림의 대협(大俠)으로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방조남 자신은 자신의 그런 성격과 운명을 아직 모른다. 작가는 자신을 잘 모르는 방조남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린(혹은 아둔한)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어른께서 보시는 바로는 제가 경박하고 불실한 놈 같습니까?”

“너의 골격을 말할 것 같으면 확실히 상선지재(上選之才)로서 기지가 가득하고 영민하나, 충후지심(忠厚之心)이 좀 모자라지. 허나 다행히도 의협심이 있어 인간의 본색을 잃진 않았어!”

“어른의 구구절절은 저의 가슴을 꼬옥 찌르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매우 절실한 감이 있습니다.”

백발노인이 돌연 수염을 쓰다듬고 웃는다.

“현재의 천하 대세를 논하자면 꼭 너와 같이 기민한 사람이 필요하다. 임시응변으로 변화에 응할 수 있는 인재로서 대세를 휘어잡아서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사람은 살려야만 이 세상에 수백 년 동안 쌓여온 사악(邪惡)한 기운이 가시고 좀무리를 소탕하여 무예계의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지!”  

방조남이 감격해서

“우둔한 제게 어른께서 너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자 백발노인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이 늙은이의 폐부에서 우러나온 말이지 너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와룡생, '무유지'>

     

상선지재이긴 하나 충후지심이 모자란다는 말은 이 소설에서 방조남의 성격과 자질을 한 마디로 잘 요약하고 있는 말이다. 타고난 머리는 있는데 엉덩이 무겁게 붙어 앉아 있지를 못해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는 물론, 무협지를 즐겨 읽는 독자층의 자기 인식과도 상통하는 내용이다. 보통의 인물인 주인공이 좋은 인연들을 만나서 큰 인물이 되어 나가는 과정을 앞으로 재미있게 늘어놓겠다는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판에 박힌 사건의 전개를 보완하는 성격 창조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구성은 결국 인물, 사건, 배경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인물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되고, 배경에 따라 또 다른 사건이 된다. 같은 재료라도 그것들을 전주비빔밥처럼 잘 버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조합의 힘이 서사의 효과를 좌우한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인문학 10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