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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11. 2019

끝이 좋아야

'관상'

끝이 좋아야     

영화 <관상>(2013)을 보면 불세출의 관상가 김내경이 권신(權臣) 한명회의 끝을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은 목이 잘릴 상이요”, 그의 신통력을 익히 알던 한명회는 겁을 먹고 평생을 조심히 삽니다. 그 노력 때문인지 세 명의 왕을 세우고 섬기면서 그는 천수를 다합니다(성종 임금과는 트러블이 좀 있었습니다). 죽기 직전 한명회는 “나는 목이 잘리지 않았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그러나 천하의 한명회도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목이 잘립니다. 죽은 지 17년 뒤, 연산군이 무덤 속에 든 그를 꺼내 목을 칩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결국 끝이 비참했습니다. 두 딸을 왕비로 만들면서까지 천하의 권세를 다 누렸던 한명회였지만 자기 팔자, 인과응보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입니다.     

보통은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좋다고 꼭 끝이 좋은 것도, 시작이 나쁘다고 꼭 끝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안 좋은 시작을 좋은 끝으로 만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옷 한 벌이라도 챙겨서 가는 게 인생이다 보니 끝이 안 좋은 사람보다는 끝이 좋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습니다. 그런 세태를 반영한 것인지, 점술가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도 “말년(末年)이 좋다”입니다. 무슨 통계자료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릴 때 점집 골목에서 자란 제 나름의 경험칙입니다. 고객들(주로 여자)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살이 끼었다”, “서방 복이 없다”, “동남쪽에서 귀인을 본다”, “말년이 좋다”와 같은 것들입니다. 두 명(자매나 친구)이나 세 명이 같이 와서 한 명은 남편 운을 묻고 다른 한 명은 결혼운을 물으면 “볼 것도 없이 좋다”(재물운, 승진운 등)와 “사주에 남자가 없다(있는데 아직 못 만났다)”를 적절히 배분합니다. 공원 앞에서 주류상을 했던 덕에 거나하게 취한 옆집 점술가 아저씨들에게 다른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신의성실의 원칙 혹은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더 이상 발설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말년이 좋다”라는 말을 꽤 많이 들었습니다. 점집 골목에서 살던 어릴 때부터 사오십대 중년에 이르기까지 틈만 나면 심심찮게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보기 안쓰럽게 살아왔다는 거겠지요. 처음에는 그냥 듣기 좋은 위로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어떤 계시처럼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노년에 든 최근에도 앞으로 남은 부귀영화가 상당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자가당착을 부추기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목이 잘리지 않았다”라고 방심(放心)하며 죽은 한명회를 보란 듯이 부관참시한 역사(?)의 엄중함을 명심해야 할 분명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말의 신비로움도 없는, 쓸데없는 사담으로 귀한 지면을 채운 것은 오직 “매사 끝이 좋아야 한다”라는 한마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곁에는 가볍고 표피적이고 순간적인 결과에 매진(열광)하는 풍조가 아주 넓게, 친숙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찰, 성숙과는 아예 담 쌓은 채 그저 찰나적 위안과 쾌에만 탐닉하는 경향이 만연합니다. 젊은 세대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나이, 지역, 계층 불문하고 다 그렇습니다. 모두 가볍고 짧게 삽니다. 정치 영역, 교육 영역, 문화예술 영역, 종교 영역 할 것 없이 모두 ‘끝’에 대한 경외심을 모르는 선무당들이 판을 칩니다. 지난 1년 우리는 아주 많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요소도 많습니다. 이제 “끝이 좋아야 한다”를 고민할 때입니다. 긴 안목으로 우리 공동체의 앞날을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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